하느님 뭐라꼬예?
하느님의 계약궤와
그분의 현존
조현권 스테파노 신부 대구대교구

하느님의 궤를 빼앗기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필리스티아인과의 싸움에서 패배하여 약 4천 명이나 되는 군사를 잃고 말았습니다. 남은 군사들이 진영으로 돌아오자 이스라엘의 원로들은 ‘하느님께서 어찌하여 오늘 우리들을 치셨을까?’ 하며, 하느님의 도움을 구하는 마음으로 실로에서 하느님의 계약궤를 전쟁터로 모시고 왔습니다. 그렇게 하면 하느님께서 틀림없이 그들 가운데 함께 하시어 원수들 손에서 자신들을 구원해 주시리라 희망했던 것이지요. 
하느님의 궤가 이스라엘 진영에 도착하자 온 이스라엘 사람들은 땅이 뒤흔들릴 정도로 큰 함성을 올렸습니다. 그 소리에 놀란 필리스티아인들은 자초지종을 듣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그 진영에 신이 도착했다.’라고 말하면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우리는 망했다! 이런 일은 일찍이 없었는데. 우리는 망했다! 누가 저 강력한 신의 손에서 우리를 구원하겠는가? 저 신은 광야에서 갖가지 재앙으로 이집트인들을 친 신이 아니냐!”(1사무 4,7-8)
필리스티아인들은 이스라엘의 신이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어떻게 구해내셨는가 하는 소문을 주변 사람들의 입으로 전해 듣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이제 자신들도 파멸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다음의 말로써 서로 사기를 북돋우고 용기를 내었습니다. “그러니 필리스티아인들아, 사나이답게 힘을 내어라. 히브리인들이 너희를 섬긴 것처럼 너희가 그들을 섬기지 않으려거든, 사나이답게 싸워라.”(1사무 4,9)
필리스티아인들은 ‘사나이답게 힘을 내어야 한다는 굳은 각오’로 싸우러 나갔고, 이에 이스라엘은 또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하느님의 궤를 모셔왔지만 기대했던 하느님의 도우심은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팔레스티아인들의 대살육에 삼만이나 되는 보병을 잃고 말았고 그토록 소중한 하느님의 궤까지 적의 손에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계약궤를 돌보던 엘리의 두 아들도 죽었는데, 그 모든 소식을 전해 들은 엘리 사제마저 앉아 있던 의자에서 넘어져 목이 부러져 죽었습니다. (엘리의 며느리로서 마침 해산 중이었던) 사제 피느하스의 아내는 ‘하느님의 궤를 빼앗긴 이스라엘에 이제 영광은 떠나고 말았다’라고 하면서 아들을 ‘영광이 없다’ ‘불명예’란 뜻으로 ‘이카봇’이라 이름 지었습니다. 하느님의 궤를 빼앗기고 시아버지와 남편마저 잃은 여인의 아픔을 아들의 이름에 남겨놓았던 것이지요. 
“주님께서 어찌하여 오늘 필리스티아인들 앞에서 우리를 치셨을까?” 이스라엘의 원로들은 하느님께서 자신들을 지켜주시지 않으심에 궁금해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하느님의 가르침을 되새겨보면서 자신들을 더 돌아보기보다 바로 하느님의 궤를 모시고 왔습니다. 하느님의 현존을 상징하는 계약궤를 모시고 오면 하느님께서 자신들과 함께하시면서 지켜주시리라 생각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하느님의 현존은 결코 그들의 인간적인 계산이나 계획과 소망에 따라 자동적 혹은 무조건적으로 결과를 이루어 내지 않았습니다. 이 이야기는 하느님의 현존은 오로지 하느님의 자유와 은혜에 달린 것임을 알려줍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고 자신을 돌아보는 자세로 은총을 청하며 그분의 섭리에 모든 것을 맡겨 드리는 일이겠습니다!

하느님의 궤가 필리스타인들을 벌하다
필리스티아인들은 승리의 전리물인 하느님의 궤를 자신들이 섬기던 ‘다곤’의 신전으로 가져다가 다곤의 신상 곁에다 놓아두었습니다. 다곤 신이라면 이스라엘인들의 신을 꼼짝 못 하게 할 것으로 생각한 것이지요. 그런데 다음날 보니 다곤 상이 땅에 얼굴을 박고 계약궤 앞에 쓰러져 있는 것 아닙니까! 이에 그들은 다곤을 일으켜 세워 놓았습니다. 하지만 다음날도 다곤이 쓰러져있었고, 심지어 그다음 날에는 머리와 두 손이 잘린 채 몸통만 남아있었습니다. 뿐만 아니었습니다. 그 지역 사람들이 종기로 쓰러져 갔던 것입니다. 
급기야 그들은 계약궤를 다른 곳으로 옮겨 놓았지만 그래도 해결이 되지 않았습니다. 계약궤를 가져다 놓은 성읍에 매우 큰 소동이 일어나고, 종기가 사람들 몸에 솟아났으며, 또 다른 성읍에서도 사람들이 죽어가거나 몸에 종기가 나는 소동이 반복되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계약궤를 옮겨간 다른 곳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찌하여 그들(필리스티아인들의 통치자들)이 이스라엘 신의 궤를 우리에게 옮겨 와 우리와 우리 백성을 죽이려 하는가?”(1사무 5,10) 그러면서 그들은 이스라엘 신의 궤를 제자리로 돌려보내어 자신들이 죽음을 당하지 않게 해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하느님의 궤가 돌아오다
그렇게 하느님의 궤가 필리스티아인들의 지역에 머무른 지 7개월, 필리스티아인들은 사제들과 점쟁이들을 불러놓고 어떻게 하면 그 궤를 제자리로 돌려보낼 수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그에 대한 그들의 대답이 이러합니다. “이스라엘 하느님의 궤를 돌려보내려면, 그냥 보내서는 안 됩니다. 반드시 그 하느님에게 보상 제물을 바쳐야 합니다. 그래야 여러분의 병이 나을 것이고, 그가 왜 여러분에게서 손을 거두지 않는지도 알게 될 것입니다.”(1사무 6,3)
필리스티아인들의 방문을 받은 사제들과 점쟁이들은 필리스티아인들의 통치자들의 수에 해당하는 종기와 쥐 모양의 금덩어리 5개를 만들어 계약궤와 함께 보상 제물로 바쳐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내신 하느님의 업적을 잘 알고 있는 듯 덧붙이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왜 여러분은 파라오와 이집트인들처럼 고집을 부리려 합니까? 그가 이집트인들을 거칠게 다룬 다음에야, 이집트인들이 이스라엘을 떠나가게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이제 새 수레 하나를 마련하여, 멍에를 메어 본 적이 없는 어미 소 두 마리를 끌어다가 그 수레에 묶고, 새끼들은 어미에게서 떼어 집으로 돌려보내십시오. 그런 다음, 주님의 궤를 가져다가 그 수레에 싣고, 그에게 보상 제물로 바칠, 금으로 만든 물건들을 상자에 담아 그 곁에 놓으십시오. 그렇게 그것을 떠나보내고 나서 지켜보십시오.”(1사무 6,6-8) 
무슨 말일까요? 그들은 만일 수레가 이스라엘인들이 머물고 있는 ‘벳 세메스’로 올라가면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자신들에게 재앙을 내린 것으로, 그렇지 않고 제 새끼들이 있는 제 고장으로 돌아가면 우연하게 재앙이 닥친 것으로 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멍에를 메어 본 적이 없는 소들이 모르는 길을 따라갈 확률은 엄청 낮으니 어려운 확률이 현실이 되면 하느님의 손길을 수긍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었지요.
사람들이 그대로 하였더니 소들은 곧장 베 세메스로 난 길을 따라 걸어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 뒤를 필리스티아인들의 통치자가 따라갔습니다. 벳 세메스 사람들은 레위인들의 손을 빌려 하느님의 궤를 큰 바위 위에 내려놓게 한 다음 수레를 부수어 장작으로 삼아 하느님께 소들을 번제물로 바쳤습니다. 필리스티아인들의 다섯 통치자들은 이를 보고 돌아갔습니다.

돌아온 하느님의 궤가 재앙을 내리다
벳 세메스 사람들은 계약궤가 돌아오는 것을 보고 기뻐하며 맞이하였고 번제물도 바쳤습니다. 그런데 이 벳 세메스 사람들에게 재앙이 내렸습니다. 축복이 아니라 재앙이 닥친 것이지요. 왜일까요? 성경은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벳 세메스 사람들이 주님의 궤를 보았기 때문에 그들을 치셨다. 그 백성 가운데에서 일흔 명과 오만 명을 치신 것이다.”(1사무 6,19) 일찍이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하신 말씀을 떠올리게 됩니다. 
- “나는 내가 자비를 베풀려는 이에게 자비를 베풀고, 동정을 베풀려는 이에게 동정을 베푼다. 그러나 내 얼굴을 보지는 못한다. 나를 본 사람은 아무도 살 수 없다.”(탈출 33,20)
- “성막을 옮겨 갈 때에 레위인들이 그것을 거두어 내려야 하고, 성막을 칠 때에도 레위인들이 그것을 세워야 한다. 속인이 다가왔다가는 죽을 것이다.”(민수 1,51)
즉 하느님께서는 사제들과 레위인들에게 당신을 섬기는 직분을 맡기시면서 분명히 말씀하신 것이지요. 만일 속인들이 계약궤 가까이 오면 죽음을 당하게 될 것임을요!
사제직을 수행한다는 일이 얼마나 엄중한 것인가를 새삼 돌아보게 됩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게 되어라’ 하신 하느님의 말씀을 더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 신자들의 성화를 위해 하느님을 좀 더 가까이 섬기도록 제정된 사제직분에 맞갖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거룩한 부르심에 감사하며 사제직에 최선을 다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