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이 속된 세상에서 이혼한 가정이 없는 도시를 상상할 수 있겠는가? 만일 그것이 가능하다면, 그곳을 찾고 싶다. 불행하게도 우리가 지금 몸담은 세상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너무도 많은 이들이 갖가지 이유로 이혼한다. 며칠 전까지 부부로 살던 이들이 이혼 소송을 마친 후,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남남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본다. 그리고 다른 이를 만나고 또 헤어진다.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가?
속을 들여다보면 그렇지 못하다. 그들은 심각한 내상을 입고 헉헉대며 살아간다. 그들의 선택이 낳은 결과이기에 수용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혼 당사자들의 고통은 논외로 치더라도, 그 가정의 자녀들은 어떤가? 결손가정의 자녀들, 그들이 남몰래 아파하며 흘린 눈물만큼 우리 사회는 병들어 있다. 그들은 이혼의 원인 제공자들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고의 피해자로 남게 되었다. 타락한 세상의 최악의 결과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2024년, 타락한 세상에서 하느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은 없는가? 이혼이 없는 곳, 이혼하지 않는 사람들이 사는 ‘도시’가 있다고 한다. 한 번 살펴보자.
발칸반도에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라는 작은 나라가 있다.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 몬테네그로에 둘러싸여 있고, 2022년 통계로 볼 때 인구는 325만 명 정도이다. 무슬림이 50%, 정교회는 30% 그리고 가톨릭 신자들이 15%를 차지하고 있다. 그곳에 ‘시로키브리예그’*라는 소도시가 있다. 도시민 모두가 가톨릭 신자이다. 그들은 그 누구도 이혼하지 않는다.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2만 6,000명이 조금 넘는 주민 가운데 헤어져 사는 가정도 없다.
혼인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온전히 결합
이와 같은 성공의 비밀은 무엇일까? 그들을 예의주시하며 살피고 있는 학자들은 그들의 뿌리 깊은 신앙과 혼인 예식 속에서 그 비밀을 발견한다고 말한다. 좀 더 살펴보자.
시로키브리예그 사람들은 여러 세기 동안 많은 고통을 겪었다. 그들의 가톨릭 신앙은, 처음에는 터키 무슬림으로부터 그리고 후에는 공산주의자들로부터 박해를 받았다. 가톨릭 신앙을 지키기 위해 비싼 대가를 치르며 배웠다. “구원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만 주어지는 것이다. 인간이 타협하여 만든 평화협정이나 조약 등은 결코 완전치 못한 것이다. 그것이 잠시의 위장된 평화는 보장해 줄지언정 영원한 행복과 안식에 이르도록 만들어 주는 것은 아니다.”라는 것이다.
그들은 삶과 죽음의 문제에 있어서 더 이상 세상으로부터 기만당하지 않을 지혜를 지니게 된 것이다. 그 지혜의 부산물로 다음과 같은 혼인 문화가 형성되었다. 혼인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온전히 결합시키는 것이다. 인간 생명을 탄생시키는 혼인을 신적 생명을 탄생시키는 십자가의 토대 위에 안치시킨 것이다. 구체적 모습을 살펴보자.
약혼자들은 혼인하기 위해 성당에 갈 때, 십자가 하나를 가져온다. 사제는 그 십자가를 축복하고 나서, 삶을 함께 나눌 파트너를 찾았느냐고 묻는 대신 이렇게 말한다.
“당신들은 배우자의 십자가를 찾았습니까? 당신들이 사랑해야 할 십자가이고 당신들이 짊어져야 할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를 내팽개쳐서는 안 됩니다. 가슴 깊이 간직하고 언제나 보존하십시오.”
그들이 혼인 서약을 할 때, 신부(新婦)는 오른손을 십자가 위에 올려놓고 신랑도 그 신부의 손 위에 자기 오른손을 포갠다. 그렇게 그들 서로가 십자가와 하나가 된다. 그들이 기쁠 때나 고통 가운데서나 서로 사랑하고 신의를 지키겠다는 혼인 서약을 예절에 따라 선언하고 교환할 때, 사제는 영대로 그들의 손을 덮는다. 그리고 두 사람은 십자가에 입을 맞춘다. 만일 두 사람 가운데 하나가 배우자를 버린다면,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버리는 것이다. 예수님을 잃게 되는 것이다. 예절이 끝난 후, 이 신혼부부는 신방의 문을 넘어서 좋은 곳에 십자가를 모신다. 그때부터 이 십자가는 그들 삶의 기준이 되고 그곳은 가정 기도의 장소가 된다. 이 젊은 부부의 가정은 그렇게 십자가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십자가의 은총이 혼인 생활 중 역경에도 견디는 힘을 줘
혼인 생활의 위기, 그들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그들의 대응 태도는 달랐다. 역경이 그들에게 닥칠 때, 변호사나 상담 심리 치료사 혹은 점쟁이에게 달려가지 않는다. 그들은 먼저 십자가를 찾는다. 두 사람은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회개의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각자의 마음을 열고 주님의 도우심에 호소하며 서로를 용서할 힘을 청한다.
이와 같은 실천적 신심은 어린 시절부터 습득되었다. 어린이들은 날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하루를 주님께 감사하며 경건한 신심으로 십자가에 입을 맞추도록 교육받으며 성장한다. 그들은 날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두 팔로 보호해 주시기에, 두려워할 것이 없다는 확신 속에 잠자리에 든다. 모든 두려움은 십자가의 예수님께 입을 맞출 때 사라진다. 그들에게 있어서, 가정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불가분리 적으로 일치하여 존재하는 것이기에, 그 어떤 역경 속에서도 지켜지고 살아남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속된 세상 속에서 더없이 필요한 지혜요 덕목이라 할 수 있다.
우리 주변을 보자. 혼인식이 있는 날, 거의 모든 이들은 자신의 혼인만은 완벽하고 그렇게 영속할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그들은 아찔한 모험의 세계에 이제 막 들어온 것일 뿐이다. 그 당시에는 온전히 깨닫지 못한다. 살면서 이 깊은 고뇌의 골짜기를 통과할 때, 두 젊은이에게 영웅적 노력이 필요함을 인식할 것이다. 그들이 얼마나 미약한 존재인지 깨닫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을 통과하고 있거나 이미 통과한 사람은 은총의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십자가의 은총이 폭풍과 고요 속에서도 그들을 견디도록 힘을 주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과 같이 느껴지는 날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가 참으로 은총이 필요한 순간임을 잊지 말자. 현재 몇몇 혼인 예식에 도입하거나 첨가하고 있는 다음과 같은 예언적인 말씀의 참된 의미를 묵상할 필요가 있다.
“십자가에 입을 맞추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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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키브리예그(보스니아어: Široki Brijeg, 크로아티아어: Široki Brijeg, 세르비아어: Широки Бријег, Široki Brijeg)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남서부에 위치한 도시로, 면적은 388㎢, 인구는 26,198명(2007년 기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