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본당(현 계산주교좌본당)의 첫 주임사제로 대구의 사도로도 불리는 김보록 로베르 신부(1853~1922)의 숨길이 서려 있는 새방골성당을 방문하였다(대구시 서구 새방로27길 9). 이번에는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방문했다. 시내버스 524번을 타고 상리 지하차도에서 하차하면 새방골성당을 안내하는 입간판이 커다랗게 보여 찾기 쉽고, 50m만 걸으면 바로 성당에 도착한다. 성당 초입에 예수성심상이 모셔져서 방문객들을 맞이한다. 작고 아담하면서 정갈한 느낌의 성당이었다.
이곳에는 김보록 로베르 신부의 흉상과 고향에서 가져온 흙을 보관한 작은 비석이 세워져 있으며, 박해시대 때의 형구 틀도 볼 수 있다. 성전 내부는 2층 성가대석이 없는 단층으로 안에 들어가면 묵상이 저절로 될 듯한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성전에 앉아서 초창기 대구대교구의 역사 중 하나인 새방골성당과 김보록 신부를 기억해 보았다.
1860년 경신박해 때 새방골로 피신하여 온 신자들로 인해 이 지역에 복음이 전파되었다. 이후 조선대목구 제7대 감목 블랑 주교로부터 경상도 지역의 사목권을 위임받은 김보록 로베르(Achille Paul Robert, 김보록, 保祿) 신부가 지방에서의 잦은 교안(敎案)으로 대구에 정착하지 못하고 칠곡군 신나무골에서 사목하며 자주 대구를 방문함에 따라 이곳 신자들도 늘어나기 시작했다.
초창기 대구대교구의 역사에서 중요한 본당
1888년 11월 김보록 신부는 신나무골에서 대구 성 밖의 송골(새방골의 일부로 대구광역시 서구 중리동)로 거처를 옮겼다. 김 신부는 송골에서 이장언 방지거에게서 매입한 밭을 포함한 초가집(임시성당)에 머물면서 열심히 사목했다. 1891년 김 신부가 경상감사 민정식에 의해 추방당하고 신부의 복사와 통역이 군졸들에게 구타당하고 사제관이 주민들에게 약탈당한 ‘대구교안(敎案)’으로 서울로 피신한 김 신부는 이 사건이 공론화되어 조선대목구 제8대 감목 뮈텔 주교와 프랑스 공사의 중재로 해결됨에 따라 1891년 4월 30일 새방골로 돌아온다. 이 ‘대구교안’은 한불조약에서 약속된 프랑스 선교사의 행동의 자유가 지방 관리에 의해 침해된 것을 조선 조정이 시정하게 된 좋은 예가 되었다.
대구교안으로 충격을 받은 김보록 신부는 1891년 음력 12월 대구 성안의 대어벌(待御伐, 현재 대구시 중구 인교동)에 거처를 옮기고(1897년까지) 새방골을 공소로 삼았다. 이후 1910년에 공소 건물이 현 성당 대지 안에 세워졌다. 1911년 계산동성당의 준공으로 이전까지 가실본당의 관할이던 새방골공소는 계산본당에 소속되었으며, 1927년에는 비산본당 소속으로 변경되었다. 1963년 12월 14일 새성전 준공과 함께 준본당으로 승격(당시 성당명은 상리성당)되었고, 1978년 12월 8일에 자립 본당으로 승격하여 오늘에 이른다. 성당 내 김보록 신부 흉상은 공동체형성 120주년을 맞아 2008년 3월에 세워졌다. 2008년 6월 13일에는 지금껏 행정구역에 따라 사용돼 온 본당의 명칭(상리성당)을 원래의 이름인 새방골성당으로 변경하였다.
김보록 신부는 1897년 계산성당을 짓기 시작하여 1898년 12월 한식 목조 십자성당을 완성하여 축성하였으나 화재로 소실되어 1903년 11월에 고딕식 벽돌성당(지금의 계산동성당)을 다시 지었다. 1911년 대구대목구가 설정된 후 초대교구장으로 부임한 드망즈 주교를 보좌하여 성영회 운영, 해성재를 지어 최초로 지방 사학의 기초를 닦았으며, 해성체육단, 명도회 등을 창설하게 하여 가톨릭 청년운동의 효시가 될 기반을 든든히 굳혔다. 하지만 그동안의 노고로 1919년 발병하여 1920년 은퇴 후 주교관에 머무르며 회고록을 작성하던 중 1922년 1월 2일 향년 69세로 선종하여 대구대교구 교구청 내 성직자 묘지에 묻혔다.
이역만리 타국에서 복음화를 위해 헌신한 김보록 신부
대구대교구는 김보록 신부를 기리기 위해 허토식을 거행했다. 2022년 12월 교구 재유럽 사제 모임에 참석한 교구장 조환길 타대오 대주교는 김보록 신부의 고향인 프랑스 벨포르-몽벨리아르교구에서 후손들에게 받은 포인세티아꽃과 흙을 2023년 1월 4일 교구청 내 성직자 묘역에 안치된 김보록 신부의 묘지에 바치며 고인을 위해 기도했다. 또한 김보록 신부가 35년간 주임신부로 사목한 주교좌 계산성당 정원에 세워진 김보록 신부 동상과 신나무골 성지 및 새방골에도 허토했다.
새방골성당에서는 이 흙을 허토하는 것보다 더 나은 방법을 고민하다가 김보록 신부 흉상 옆에 작은 비석을 세우고 흙을 보관하기로 하였다. 비석 안의 흙을 보니 이역만리 타국에서 45년이란 긴 세월 동안 복음화를 위해 헌신하신 김보록 신부와 이를 도와 대구대교구의 기틀을 다진 초창기 신자들의 노고가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