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예수 성심
‘성심’은 가톨릭 신앙인이 아니라도 한 번쯤은 들어본 단어일 것입니다. ‘성심병원’이나 ‘성심약국’처럼 유독 병원이나 약국 이름으로 많이 쓰는 말이지요. 성심(聖心), 거룩한 마음이라 하면 종교적인 뜻이 담겨 있으리라 짐작은 하지만, 막상 뜻을 설명하자면 난감한 단어이기도 합니다.
가톨릭 신앙인들은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다음 금요일에 예수 성심 대축일을 지내고, 유월 내내 성심성월 기도를 바칩니다. 매달 첫 금요일에 바치는 성시간도 예수 성심께 봉헌된 시간입니다. 하지만 그런 신심을 통해서 우리가 신앙 신비의 어떤 면을 기념하는지는 잘 알려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예수께서 성녀 마리아 알라콕 수녀에게 환시를 보여주셔서 성시간을 지낸다는 역사적 유래에 대해서는 많이 듣지만, 그 뜻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설명이 부족했나 봅니다.
2. 심장의 의미
예수 성심은 영어로 Sacred Heart라고 씁니다. 마음 대신에 ‘거룩한 심장’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성경의 백성들, 나아가 서구 문화는 심장에 특별한 의미를 뒀습니다. 서양 학문 전통의 큰 기둥이었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심장에 영혼이 머문다고 주장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주장을 정설로 받아들였습니다. 서양 의학의 근간을 세운 갈레노스 역시 인간 영혼이 심장에 머문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심장은 단지 하나의 장기가 아니라 인간의 모든 것이 담긴 결정체로 다뤄졌던 것이지요.
3. 심장과 갈비뼈
구약의 전통도 비슷한 맥락입니다. 창세기 2장에는 아담과 하와의 창조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하와를 창조하실 때, 사람 몸에 있는 3백 개가 넘는 뼈 중에서 하필이면 갈비뼈를 빼서 만드셨다지요. 왜 하느님은 튼튼한 다리뼈나 두개골이 아니라 기침만 잘못해도 부러지는 갈비뼈로 하와를 만드셨을까요?
어떤 이는 갈비뼈가 하나쯤 없어도 별 지장이 없는 것이라서 그러셨을 것이라고 합니다만, 성경의 시각은 달랐습니다. 먼저 창세기 2장 20절은 홀로 있는 인간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는 사람인 자기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찾지 못하였다.” 혼자이기 때문에, 사랑하고 사랑받을 상대가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외로운 인간입니다. 이 인간에게 짝이 생기려면 먼저 필요한 일은 닫혀 있는 마음을 열고 빗장을 푸는 것입니다. 자기 힘으로는 마음의 빗장을 푸는 일이 쉽지 않으니 하느님께서 아담, 곧 사람을 잠들게 하시고 그 갈빗대를 빼내서 협조자를 만들어 주십니다. 심장을 둘러싸는 갈빗대를 빼셨다는 것은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던 심장, 영혼의 거처인 심장을 둘러싸던 빗장을 풀어주셨다는 이야깁니다.
또 이렇게 빼낸 갈빗대로 사람의 협력자를 만드셨다는 것은 사람이 서로에게 서로 심장을 보여주고 또 보호해 주는 관계로 창조되었다는 말씀이겠습니다. 자기 세계에 꽁꽁 매여 사는 사람에게는 협조자가 없습니다. 사랑하고 사랑받을 상대가 없는 삶입니다. 삼위일체의 영원한 하느님을 닮은 인간이라고 불리기 민망한 모습이지요. 사람이 하느님이 창조하신 대로 온전한 삶을 누리려면, 자기 심장을 감싸고 있던 갈빗대를 적어도 하나쯤은 내려놓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사랑하고 사랑받는 협조자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삼위일체를 닮은 삶이고 하느님께서 뜻하신 삶입니다.
4. 상처와 심장
예수 성심의 신비는 바로 그런 맥락에 있습니다. 예수께서 당신 심장을 드러내신다는 것은 당신의 모든 것을 열어 보이고 내어 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옛 신앙인들은 예수 성심을 늘 예수님 옆구리의 상처와 함께 생각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찔리신 그 상처를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의 심장, 예수님의 전 존재, 가장 내밀하고 본질적인 그분의 인격을 보게 된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문이시므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옆구리가 창에 찔렸을 때 여러분에게 그 문이 열린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무엇이 흘러나왔는지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이 그리스도께 들어가고자 하는 곳을 선택하십시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그리스도의 창에 찔린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흘러나왔습니다. 그 물로 여러분은 정화되고 그 피로 여러분은 구원을 받습니다.”(설교집, 311,3)
예수 성심에 대한 신심은 중세기에 특별히 두드러졌습니다. 베르나르도, 보나벤투라, 루갈다 성인같이 학식과 성덕으로 유명한 많은 성인들이 이 신심을 발전시키고 권장했습니다. 성인들은 예수님의 상처를 드러난 그분의 심장에서 자비의 자리, 약속의 땅, 참 하느님 나라를 발견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신심은 근대에 들어서면서 새로운 발전을 거듭합니다. 얀센주의자들이 하느님의 엄격한 심판을 주장하였을 때에, 예수 성심에 대한 신심은 효과적인 대응책이 되었고, 신자들에게 주님에 대한 사랑과 주님의 성심으로 상징되는 그분의 무한하신 자비에 대한 신뢰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신앙생활 속에서 유독 하느님의 심판을 강조하면서 엄격한 규율과 규칙만을 강조하던 사람들에게, 상처를 통해 당신의 심장을 열어주시는 예수님의 겸손과 온유, 넘치는 사랑과 자비를 일깨운 것이 예수 성심 신심이었던 것입니다.
5. 상처를 통해서 마음을 열기
우리 레지오 단원들에게도 한 번쯤은 서로 마음 상할 일이 있겠지요. 성향이 다르고 처지가 다른 사람들이 한 단체를 통해서 함께 신앙생활을 해간다는 것이 그리 만만한 일은 아닙니다. 주고받는 말 속에 서로 상처를 줄 일도 생길 수 있고, 또 그런 상처를 받고 싶지 않아서 마음의 벽을 세우는 경우도 있습니다. 때로는 그 닫힌 마음을 규칙이나 규율 같은 것으로 억지로 뚫어 보려고도 합니다. 영 마음에 내키지 않는 일을 강요하려고 법과 규칙을 앞세우는 경우 말씀입니다.
그러나 성심성월에 우리에게 상처 입은 옆구리를 보여주시고, 그 상처를 통해서 당신의 심장을 열어 보이시는 예수님의 자비로운 마음은 높이 세웠던 내 마음의 벽을 다시 보게 합니다. 인간은 상처를 통해서 서로 마음을 보여주어야 하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심장을 드러내고 보호해 주는 존재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