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대적 배경
431년 아일랜드 수호성인인 패트릭 성인이 아일랜드에 가톨릭을 전파한 이래, 아일랜드의 가톨릭 수도원들이 6~8세기 성경 필사본의 중심지가 되는 등 아일랜드는 완벽한 가톨릭 국가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1171년 영국의 헨리 2세가 아일랜드의 남동부 랜스터 지방을 침략하면서 아일랜드는 영국에 예속되기 시작하였다. 결국 아일랜드는 1949년 완전한 독립 국가가 될 때까지 800년 가까이 영국의 지배를 받았다. 1534년 헨리 8세가 영국의 국교를 성공회로 바꾸고 이를 아일랜드 국민에게 강요하자 아일랜드 국민들은 이에 반기를 들고 저항하였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은 아일랜드의 저항을 철저하게 무력으로 진압하는 동시에 토지를 몰수하고, 영국인들을 아일랜드로 이주시키는 정책까지 강행하였다. 이에 1580년과 1595년에 아일랜드인들은 독립전쟁을 일으키고 영국에 대항하였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1845년에서 1851년 사이 아일랜드에 감자 마름병이 돌아 유일한 주식인 감자가 전부 썩어 버렸고 기록적인 한파까지 덮쳐 150만 명이 굶어 죽었으며, 살기 위해 타국으로 탈출한 사람이 100만 명이 넘었다. 그 후 30년 동안 식량 사정이 조금씩 회복되는 듯하였으나 1877년에서 1879년 사이 또다시 감자 기근이 발생하고 전염병까지 돌아 수많은 사람이 죽어 나갔다. 여기에 영국의 박해까지 계속되자 사람들은 이제 하느님이 아일랜드를 버리셨다며 좌절하였다. 이렇게 아일랜드인들이 역사상 가장 깊은 절망에 빠져 있을 때 노크에서 성모님이 발현하셨다.
2) 성모님의 발현
1879년 8월 21일 아일랜드의 동쪽에 위치한 가난하고 작은 마을 노크에 비가 오고 있었다. 저녁 8시경 사제관 가정부인 메리 매크로플린은 친구인 마거릿 번 부인을 만나기 위해 교구 성당을 지나가다가 성당의 남쪽 벽에서 환하게 빛나는 형상을 보았지만 그냥 지나쳐 갔다. 메리는 마거릿 집에서 이야기를 나눈 후 사제관으로 돌아올 때 마거릿의 딸 메리 번이 동행해 주었는데 오는 길에도 교구 성당 벽에서 환한 빛이 계속 빛나자 메리 번과 함께 가까이 다가가 보았다. 세 개의 형상이 땅에서 60cm 정도 공중에 떠 있었는데 쏟아지는 빗속에서도 형상들과 그 아래의 땅, 성당의 남쪽 벽은 전혀 젖지 않은 상태였다.
메리 번은 영상이 약간 움직이는 것을 보고 단순히 동상은 아니라고 판단하는 순간, 가운데에 있는 형상이 바로 성모님이라는 생각이 번쩍 들자 놀라 집으로 달려갔다. 그녀는 어머니와 오빠, 여동생, 사촌에게 성모님이 나타나셨으니 빨리 가보자고 하여 가족들을 데리고 다시 성당으로 가면서 이웃들에게도 알렸다. 이 놀라운 소식에 15명의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쏟아지는 비에 옷이 흠뻑 젖은 채로 묵주기도를 바치며 성모님의 발현을 직접 목격하였다. 세 형상은 일반 사람과 크기가 비슷했으며 가운데는 성모님, 그 오른편에는 성 요셉, 왼편에는 사도 성 요한이 있었다. 사도 성 요한의 왼편에는 아무런 장식도 없는 평범한 제단이 있었고, 그 위에는 십자가와 어린 양 한 마리가 있었으며, 발현이 진행되는 동안 6명의 천사가 날개를 펄럭이며 십자가가 있는 제대 위를 돌고 있었다. 생후 8주 정도로 보이는 어린 양으로부터 나오는 빛이 가장 밝았다.(이는 하느님의 어린 양인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성모님은 흰색 겉옷에 흰색 망토를 걸치셨고 머리에는 황금 왕관을 쓰고 계셨다. 그리고 두 팔을 가슴 높이까지 들고 시선은 하늘을 향하여 기도하는 모습이셨다. 성 요셉은 백발노인의 모습으로 긴 겉옷을 입고 성모님을 향해 공경하는 자세로 합장한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주교 복장을 한 사도 성 요한은 왼손에는 복음서를 들고 오른손으로는 축복을 내리는 듯한 모습이었지만 어떠한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잠시 후 빛이 점점 어두워지면서 빛과 함께 모든 것이 완전히 사라졌다. 노크에서 일어난 발현은 다른 발현과 많은 차이가 있다. 성모님이 어떠한 메시지도 남기지 않으셨으며 성 요셉, 사도 성 요한 등 성인과 함께 나타나신 유일한 발현이며, 제대와 어린 양, 6명의 천사가 날아다닌 것도 매우 이례적이다.
3) 성모님의 발현 이후
성모 발현에 대한 언론 보도가 나오고 치유의 기적이 이어지자 ‘노크에서는 잠을 잘 수 있는 침대나 의자를 찾을 수가 없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순례자가 급증했다. 6세 이후로 청각장애를 앓고 있던 여인이 성지를 방문하는 동안 청력을 다시 회복했으며, 10년 동안 앞이 보이지 않던 마이클과 존 매캐너는 시력을 완전히 회복했고, 오랜 세월 동안 걸을 수 없던 메이 프렌더개스트는 성모님이 발현하신 남쪽 벽 앞에 있는 의자에 앉자 즉시 걷게 되었다. 이에 투암 교구의 존 맥 헤일 대주교는 1879년 10월 8일 조사위원회를 구성하고 3명의 신부를 파견하여 시현자들을 조사하였다. 조사위원회는 시현자들의 증언이 모두 신뢰할 만하며 만족스럽다는 보고서를 제출했으나 대주교는 무슨 이유가 있었는지(영국의 보이지 않는 압박으로 예상됨) 이에 대하여 어떠한 공식적인 의견을 제시하지 않았다.
그리고 57년이 지난 후 1936년에 토머스 패트릭 길마틴 대주교는 아일랜드 가톨릭 신자들의 요청에 응답하여 다시 조사위원회를 구성하여 재조사를 시행하였다. 조사위원회는 그때까지 살아있던 2명의 시현자 증언과 이전 조사내용을 검토한 결과 역시 성모 발현에 대하여 긍정적인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이번에도 대주교는 어떠한 공식적인 입장을 내놓지 않았다. 이런 애매한 상황에서 1979년 9월 30일 역대 교황 중 최초로 아일랜드를 순방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성모님 발현 100주년을 기념하여 노크의 성모 성지를 방문하였다. 교황은 성지의 성모 성당을 대성당으로 승격하였으며, 성모님께 교황의 공인과 공경을 표시하는 황금 장미와 기념 초를 봉헌하였다. 이로써 노크의 성모 발현은 교황청의 인정을 받게 되었다.
1877년부터 시작한 제2차 감자 기근과 영국의 박해로 사람들이 굶어 죽기 시작하자 아일랜드 국민들은 하느님이 자신들을 버리시어 더는 그분의 백성이 아니기에 이런 끔찍한 일이 벌어지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동안 수많은 난관 속에서도 가톨릭 신앙에 의지하여 견뎌 온 아일랜드 국민들은 삶의 의지를 상실하고 모든 것을 포기하였다. 그런데 이렇게 미래와 희망이 사라진 아일랜드에 기적처럼 성모님이 발현하신 것이다.
발현하신 성모님은 아무런 메시지도 남기지 않으셨지만 아일랜드 국민에게는 성모님이 나타나신 것 자체가 바로 메시지로였다. 하느님이 아일랜드를 버리신 게 아님을 확인한 것으로 충분했던 것이다. 아일랜드인들은 다시 하느님의 백성으로 돌아왔으며 그들의 신심은 더 깊어졌고 미래에 대한 희망도 다시 살아났다. 그리고 성모님이 발현하시자 3년 동안 이어진 지독한 기근도 사라졌다. 바로 이것이 성모님에 대한 아일랜드인들의 신심이 다른 어떤 가톨릭 국가와도 비교되지 않는 이유이다. 그들은 노크를 성스럽게 여기며 대규모의 성모 성지를 조성하였고, 성모님을 아일랜드의 여왕으로 받아들였다.
<사진 설명(위로부터)>
- 성모 발현 기념 경당에 모셔진 성모님 성상.(좌) 전면이 유리로 되어있어 내부의 제단이 들여다 보이는 성모 발현 기념 성당(우)
- 성모님 발현 때의 모습이 재현되어 있는 성모 발현 기념 경당의 제단.
- 다시 걷는 기적을 받았던 사람들의 지팡이가 걸려있는 교구 성당의 남쪽 벽
- 노크 성지를 방문하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1979년)와 교황이 봉헌한 황금 장미
- 성모 발현 기념 경당에서 묵상을 하고 계신 프란치스코 교황(2018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