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보기
포스트 코로나 시대,
레지오 마리애 단원의 자세
박문수 프란치스코 의정부교구 사목연구소 초빙연구원

포스트 코로나 
영어 ‘포스트(post)’는 시간적으로 ‘뒤’와 ‘벗어난다(脫)’는 두 가지 뜻을 다 갖고 있습니다. 포스트를 ‘뒤’로 보면 포스트 코로나는 코로나 팬데믹이 종식된 이후의 시간을 가리킵니다. 지금이지요. 포스트를 ‘벗어난다’로 보면 포스트 코로나를 ‘극복한다’는 뜻으로 새길 수 있습니다. 단순히 시간을 보내는 데 그치지 않고 팬데믹 때 받은 영향을 극복하려 노력하며 살아간다는 말이지요. 전문가들은 포스트 코로나라는 말을 이 두 가지 의미를 다 담아 사용합니다. 레지오 단원들도 포스트 코로나를 ‘팬데믹 영향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며 살아간다’는 뜻으로 새기면 좋겠습니다.

무너진 습관 회복  
저는 4년 전 코로나 팬데믹이 발령되고 두 달이 지났을 때, 두 달 사이 신자들이 팬데믹으로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모바일 조사기관과 협력하여 신자들에게 핸드폰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하였습니다. 당시 전국에서 7천여 명 가까운 신자분들이 조사에 참여하였습니다. 이 조사에서 놀라운 결과가 나왔는데 절반 가까운 신자가 ‘몸에 익힌 습관이 두 달도 안 돼 무너졌다’고 답한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습관은 매주 주일미사에 참례하던 습관, 정기적으로 기도하고 성경을 읽거나 영적 독서를 하던 습관을 뜻하였습니다. 이분들이 설문지 맨 뒤에 쓴 의견을 보면 ‘그리 오래 익힌 습관이 두 달도 안 돼 무너지는 것이 너무 허망했다’는 평가가 많았습니다. 참여자들은 대부분 열심한 신자였습니다. 이분들이 이 정도였다면 다른 소극적인 신자들은 더 큰 영향을 받았을 게 틀림없습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어떤 것이든 습관을 들이려면 최소한 반년 이상 꾸준히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 습관을 들였으면 그다음부턴 쉬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하지 않으면 금세 이전 상태로 되돌아갑니다. 습관을 들이고 이를 지속시키는 데는 달리 왕도가 없습니다. 그저 규칙적으로 쉬지 않고 반복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형식처럼 보일 수 있지만 어떠한 일도 규칙적으로 반복하다 보면 어느 순간 질적으로 변하게 됩니다. 영성 수련도 그렇습니다. 특별히 뭘 하는 것 같지 않은데도 규칙적으로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목표하던 바가 실현됩니다. 이것이 습관의 힘입니다. 
레지오 단원은 누구나 이런 좋은 습관을 몸에 익혔습니다. 설사 습관이 무너지거나 약화한 경우라 하더라도 다시 시작하면 금세 회복할 수 있습니다. 다른 성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실하게 규칙적으로 반복하다 보면 이전 습관을 회복하는 것을 넘어 다른 차원으로까지 발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늦었다고 포기하지 말고 바로 다시 시작하십시오.

이미 하고 있는 기도를 잘하기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은 영성 수련을 할 때 새로운 방법을 배우기보다 기존에 알던 방법을 잘 쓰는 게 좋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지금 실천하는 것도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익히는 데 꽤 공을 들였습니다. 단지 오래 하다 보니 꾀가 났을 뿐이지요. 일종의 권태에서 오는 태만이라 할까요. 이는 냉담의 원인이기도 합니다. 
우린 이럴 때마다 초심을 강조하지만 초심으로 돌아가기는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마음은 간절해도 처음 시작할 때의 열정을 회복하진 못하니까요. 그러면 대안은 무엇일까? 영성의 대가들은 ‘새롭게 결심하는 것’이 대안이라 하였습니다. 새로운 결심이 초심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도 새로운 결심을 통해 권태에 빠진 신앙생활에 활기를 불어넣을 수 있습니다.
특히 레지오 단원은 이렇게 하시면 됩니다. 묵주기도에는 아시다시피 신앙 고백, 가톨릭의 대표적 기도(주모경)가 모두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습관적으로 바치다 보니 본래 가진 기도의 의미가 많이 약해졌습니다. 어찌 보면 해치우기식이 된 셈이지요. 어떤 단원은 묵주기도는 염경기도라서 소리 내 바치다 보면 분심이 사라진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묵주기도가 분심을 사라지게 하는 수단이라는 것입니다. 분명 그렇습니다. 그러나 염경기도는 소리 내 바치는 것 자체가 이미 기도입니다. 수단과 목표가 분리되지 않습니다. 더 좋은 방법은 분심 없이 기도문의 의미를 마음 깊이 새기며 바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굳이 다른 기도를 바치지 않아도 충분히 관상에 이를 수 있습니다. 이처럼 단순한 방법이 좋습니다. 따라서 새로운 방법을 배울 시간이 없다면 이미 하던 방법을 잘 쓰는 게 왕도입니다.

몸으로 봉사하기 
모든 종교에서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가치는 몸으로 이웃에 봉사하는 일입니다. 여기서 ‘몸으로 한다’는 내가 ‘몸을 직접 움직인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웃에 봉사하려면 우리는 먼저 그 이웃을 생각하고, 그다음 만나야 합니다. 만나면 눈을 맞추고 그의 손을 잡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가 필요한 일을 몸을 써 도와야 합니다. 물론 달리 몸을 쓰지 않더라도 그 시간에 이웃과 함께 있으려 시간을 낸 것 자체가 이미 몸을 쓴 것입니다. 병들어 누워 있어도 이웃을 위해 몸을 쓸 수 있습니다. 이웃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여기며 그를 위해 기도해 주는 것이지요. 병석에서 바치는 화살기도와 묵주기도가 직접 만나지 못하는 이웃을 기억하는 좋은 방법입니다. 
과거 레지오가 한국 교회를 성장시킬 때 단원들이 매주 하는 봉사가 큰 기여를 했다고 했습니다. 이때 단원들이 실천한 봉사가 곧 사랑이자 기도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면이 많이 약화되었습니다. 세상의 문화도 많이 바뀌었고 사람과의 만남과 접촉이 갖는 의미도 많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변치 않는 사실은 몸으로 직접 만나는 일만큼 좋은 사랑 실천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몸을 움직여 누군가를 돌보는 일이 교회를 다시 일으킬 방법이고, 새로운 단원을 얻지 못하더라도 레지오가 끝까지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는 길입니다.

지혜를 나누는 노년 
아무리 원해도 고령이 되면 몸을 움직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경제적인 것에도 영향을 많이 받지요. 그럼에도 공을 나눈다는 의미의 통공(通功)은 계속할 수 있습니다. 연옥 영혼을 위해서뿐 아니라 전구 기도를 통해 살아 있는 이웃과 통공할 수 있습니다. 손자녀를 위해 기도하고 그들에게 지혜를 나눠주는 것도 좋은 기도입니다. 창 너머에 존재하는 죽음을 의식하며 남은 삶을 기쁘게 살아내는 것도 훌륭한 기도입니다. 그렇게 신앙 안에서 멋지게 늙는 것이 주님께 잘 돌아가는 방법입니다. 무엇보다 천국을 향해 순례하는 교회를 위해 기도를 쉬지 않는 것이 레지오 단원이 교회에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입니다. 이런 기도는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쉬지 않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