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살아가면서 본의 아니게 절망 또는 좌절, 배신, 질투, 무고라는 감정상의 또는 정서상의 부정적인 행태들을 겪기도 하고, 그로 인해 힘겨워하고 고통스러워한다. 그리고 교회에는 이러한 감정적 폐해를 겪는 피해자가 이를 잘 극복하도록 돕는 성인들이 있다.
절망스러운 상황에서는 성녀 리타(축일 5월 22일)를 기억해요
성녀 리타는 14세기 말에 이탈리아 중부의 카시아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수도자가 되고 싶었던 성녀는 부모의 뜻에 따라 12살에 강제로 결혼했다. 성격이 난폭하여 어린 아내에게 학대와 폭행을 일삼던 남편은 어떤 사람과 싸우다가 살해되었다. 그리고 두 자녀는 병에 걸려 세상을 뜨고 말았다. 성녀는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하며 지냈다.
그러는 한편, 마음에 두었던 어느 수도회에 입회 신청서를 세 차례나 냈지만 기혼자였다는 이유로, 가정생활이 화목하거나 행복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번번이 거절당했다. 그러나 성녀는 포기하지 않고 기도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집에서 밤새워 기도하던 성녀가 문득 수녀원 기도방으로 옮겨져 기도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튿날 아침에 성녀를 발견한 수녀원에서는 하느님의 뜻이라 여겨 성녀의 입회를 허락했다.
이후로 성녀는 선종할 때까지 지난날의 삶을 반성하며 자신처럼 불우한 사람들을 위해 고행하고 기도하는 데 전념했다. 성녀는 여러 차례 환시를 체험했고, 죽기 15년 전에는 가시관을 쓰신 예수님처럼 머리에 상처가 생겼다. 이 상처는 죽을 때까지 계속 남아 있었다. 그리고 선종 후에도 성녀의 유해는 부패하지 않았고 이마의 상처도 그대로 있었다고 한다.
불우한 처지에서도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하느님을 향한 굳은 믿음으로 불우한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며 지낸 성녀는 좌절하고 실망한 사람들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는다.
배신감으로 괴로울 땐 성녀 풀케리아 아우구스타(축일 9월 10일)를 기억해요
성녀 풀케리아 아우구스타는 4세기 말에 동로마 제국의 황제 아르카디우스의 딸로 태어났다. 그런데 9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2살 아래의 어린 동생이 황제 자리를 이어받게 되었다. 그리고 15살 때 제국의 원로원은 성녀를 황후나 영예로운 여성에게 내리던 칭호인 ‘아우구스타’라 부르기로 결의했고, 이로써 성녀는 황제의 섭정이 되었다. 진즉에 동정녀로 살기로 서원한 성녀는 동생의 성장과 교육을 위하여 헌신했고, 그러다 보니 궁중의 분위기가 마치 수도원처럼 바뀌었다고 한다.
성녀가 섭정 역할을 수행한 지 7년 되는 해에 결혼한 동생 황제는 자신의 아내에게도 아우구스타 칭호를 부여했다. 그리고 황제의 누이인 성녀와 아내인 올케 사이에는 알력이 생겼다. 올케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주교이던 네스토리우스의 이단을 지지함으로써 정통 교회를 옹호하던 성녀를 배신했다. 그리하여 성녀는 궁중에서 쫓겨났다. 그런데 이번에는 올케가 황제에게 불충했다는 이유로 유배를 갔고, 성녀는 궁중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얼마간의 세월이 흐른 뒤 황제가 사냥을 하던 중 말에서 떨어져 세상을 등졌다. 이에 성녀는 황녀가 되어 제국을 통치하게 되었다. 성녀는 나라를 다스리는 한편, 가톨릭을 지지하고 옹호하며 교회, 구호소, 병원들을 세워 그리스도교의 정신과 사랑을 실천했다. 그리고 451년에 열린 칼케돈 공의회에서는 ‘그리스도 단성설’이라는 이단이 단죄되도록 힘썼다.
가까운 이에게 배신을 당했으나 이를 믿음으로 극복하고 나라와 교회를 위해 헌신한 성녀는 배신을 당해 고통스러워하는 이들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는다.
질투 때문에 마음 아플 땐 성녀 헤드비지스(축일 7월 17일)를 기억해요
성녀 헤드비지스는 14세기에 옛 헝가리와 폴란드 왕국에서 왕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성녀는 아직 아기였던 두, 세 살 무렵 오스트리아 왕국의 한 공작과 정략결혼을 약속하고 한동안 비엔나에 가서 지냈다. 그런데 아버지가 죽은 뒤 맏언니마저 세상을 떠나자, 성녀는 13살에 왕국을 이끌어갈 새로운 후계자로 지목되었다. 성녀는 여왕 자리에 오르면서 오스트리아 공작과의 약혼을 포기하기로 했다. 오직 조국 폴란드와 그 백성을 위해 봉사하는 것만이 자신에게 맡겨진 하느님의 뜻이라 여기고 그에 따르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리고 리투아니아의 귀족인 야기엘로 대공과 결혼했다.
이 결혼은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두 나라가 하나로 통합되고 거의 400년 동안 평화로운 동맹을 유지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교도였던 야기엘로는 성녀와 결혼하면서 자신과 전 리투아니아 백성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겠다고 약속했다. 이 약속대로 리투아니아는 신앙심 깊은 그리스도교 국가가 되었다. 야기엘로는 또한 두 나라가 통합된 뒤 자신의 이름도 폴란드의 라디슬라우스 2세로 바꾸었다. 한편, 성녀는 라디슬라우스의 개종을 도왔고, 앓는 이들과 가난한 이들에게 선을 베풀며 살았다. 그리고 아기를 출산하는 도중에 숨을 거두었다.
라디슬라우스는 본래 자기 아내의 아름다운 모습에도 과민하게 신경 쓸 정도로 질투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고집불통에다 걸핏하면 화를 내는 사람이었다, 그러한 라디슬라우스를 어질고 착한 그리스도인으로 변화시킨 것은 성녀의 믿음과 신심이었다.
고집불통이 남편의 질투심마저 가라앉힌 성녀는 질투의 대상이 되어 마음 아픈 이들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는다.
억울하게 무고당하면 성 도미니코 사비오(축일 3월 9일)를 기억해요
성 도미니코 사비오는 19세기 중반에 이탈리아 토리노 가까운 곳에서 가난한 대장장이의 10자녀 가운데 하나로 태어났다. 그리고 5살 때부터 미사 복사를 했고, 7살 때 첫영성체를 했으며, 어려서부터 사제가 되고자 했다.
본당신부의 추천으로 마침 청소년 사목을 준비 중이던 성 요한 보스코 신부와 연결되었고, 12살 때 토리노에 있는 종합기숙학교에 입학했다. 성인이 되려는 열망이 넘쳤던 도미니코 사비오는 여러 가지 특이한 고행을 하고자 했다. 그러나 성 요한 보스코의 지도를 따라 특이한 고행보다는 하루하루의 일상에서 자신의 일을 충실히 해나가는 데서 성화의 길을 찾았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몹시 추운 어느 겨울날, 같은 반 친구 2명이 교실의 난로에 눈덩이와 쓰레기를 가득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때마침 교실에 들어온 선생님에게 도미니코 사비오가 그런 나쁜 짓을 했노라고 거짓 고자질을 했다. 도미니코 사비오는 모든 반 친구가 보는 앞에서 벌을 서면서도 두 개구쟁이 친구들이 한 짓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중에 왜 자기가 하지도 않은 일에 대해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느냐는 물음에 도미니코는 사비오는 이렇게 대답했다. 온갖 고통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면서도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신 주 예수님을 본받고 싶어서 그랬노라고 말이다.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굳이 자신의 결백을 내세우려 하지 않을 만큼 나이에 비해 성덕이 출중했던 성인은 억울하게 무고를 당한 이들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