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은 성모님의 달입니다. 부활 시기를 잘 지내고 계시는지요? 성모님을 두고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은 이렇게 외칩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루카 1,42)
과연 복되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단순히 세상에서 말하는 ‘행복’을 의미할까요? ‘복되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Εὐλογημένη(에우로게메네)는 좋은+말씀(의미)이란 뜻입니다.
사실 그리스도인에게 중요한 질문은 “나는 행복한가?”가 아닙니다. “나는 행복한가?”가 아니라 “내 삶은 의미 있는가?”입니다. 전자의 질문보다는 후자의 질문을 함으로써 나는 달성할 수 없는 낭만적 이상으로 나 자신을 괴롭히지 않으며, 더 중요한 것은 신에게 인간의 조건에서 나를 면제해 달라고 요청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 삶은 고통, 질병, 외로움, 아픔 속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느낄 때 비로소 의미 있는 삶이 됩니다.
그런 면에서 기쁨은 신자 생활에서 중요합니다. 기쁨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인간의 전형적인 반응입니다. 즉 하느님을 체험할 때 우리는 기쁨을 느낍니다. 그러므로 기쁨은 또한 하나의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모님의 노래는 그것을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루카 1,46-48)
의미는 어떤 가치가 실현될 때 발생합니다. 이것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경험가치-아름다움을 경험할 때 의미(기쁨) 체험입니다.
창조가치-무엇인가를 최초로 새롭게 창조할 때 느끼는 의미와 기쁨입니다.
관점가치-시련과 고통 속에서도 그것에 절망하지 않고 태도나 관점을 바꾸어 바라볼 때 느끼는 기쁨과 의미입니다. 즉 관점이 변했을 때 발생 되는 의미로 이것을 신앙의 세계에서는 ‘회개’라고도 합니다.
결국, 우리의 행동이 하느님의 행동과 조화를 이룰 때 의미가 발생 됩니다.
근육, 민첩성, 아름다움, 광채, 은혜는 하느님의 영광을 반영하지만,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서 능력을 나타내는 주된 방식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서 자주 느끼셔야 하는 기분은 어떤 것일까요?
자신의 열정에 부끄러움을 당하고 자신을 설명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면, 자신의 선함을 오해하는 사람들로부터 저주를 받아 무력감을 느낀 적이 있다면, 당신은 이 세상에서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느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성모 마리아님께서는 십자가 아래에서 그것을 느끼셨습니다.
죽음을 받아들여 품는 삶만이 진정으로 생기있고, 만족할 줄 아는 삶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자본주의가 극도로 발달한 ‘분초사회’입니다. 분초를 다투며 자기 자신을 자기 스스로 밀어붙이는 성과주의 경쟁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쇼핑하는 인간이야말로 현대인의 표상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죽기에는 너무 생기가 넘치고, 살기에는 너무 죽어있습니다.
“삶을 죽음으로부터 떼어놓기는 자본주의 경제의 본질적 요소인데, 이 떼어놓기가 설 죽은 삶을, 산 죽음을 낳는다. 자본주의는 역설적인 죽음 충동을 산출한다. 자본주의는 삶을 죽인다. 치명적인 것은 죽음 없는 삶을 향한 자본주의의 노력이다. 성과 좀비나 피트니스 좀비, 보톡스 좀비는 설 죽은 삶의 모습들이다. 설 죽은 자들은 어떤 생기도 없다. 오로지 죽음을 받아들여 품는 삶만이 진정으로 생기있다. 건강 히스테리는 자본 자체의 생명 정치적 모습이다.” <‘오늘날 혁명은 왜 불가능한가’, 한병철, 26>
오늘날 규제 없는 자본주의는 우리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처럼 유혹하고 모든 것을 소비하도록 유혹합니다. 하지만 죽음을 받아들여 품는 삶만이 진정으로 생기있고, 만족할 줄 아는 삶이 아름답습니다.
5월은 성모님의 달, 우리의 삶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살펴보는 아름다운 한 달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