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 받은 사람
대략 이십 년 전 이야기입니다. 구룡포 항구를 지나는데, 부둣가에 둘러앉아 해산물 손질을 하시던 할머니들의 수다가 어깨너머로 들립니다. 바삐 손을 놀리시던 할머니 한 분이 일하다 말고 영감님 밥상 차려주러 가야 한다며 일어서니, 한 ‘아지매’가 냅다 고함을 지릅니다. “여자 나이 환갑 지나서 남편 살아 있으면 오복(五福)에 못 든다아아~!”
오복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여러 가지 설이 있습니다만, 유교 경전인 ‘서경’은 수(壽), 부(富), 강녕(康寧), 유호덕(攸好德), 고종명(考終命), 이 다섯을 들고 있습니다. 오래 살고 재물이 넉넉하고 몸이 건강하며 덕을 좋아하고 편안한 죽음을 맞는 것이 복이라는 것이지요. 민간에서는 덕 대신에 높은 자리에 앉는 귀(貴), ‘고종명’ 대신에 ‘많은 자손’을 넣기도 합니다.
오늘날도 사람들은 그런 복을 서로 빌어주는가 하면, 어떤 초인적 존재에 기대기도 합니다. 많은 종교와 신화에서 신은 인간의 바람을 들어줄 수 있는 비범한 존재로 소개되지요. 신은 비바람을 일으키고 천둥 벼락을 내리는 강력한 힘으로 길흉화복을 좌우합니다. 몹쓸 병에 걸리거나 재산이 축나는 것, 예상치 못한 죽음 같은 일은 신의 노여움을 샀기 때문이고, 원하는 복을 얻은 것은 신의 환심을 살만한 일을 했기 때문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은 일이 안 풀리거나 우환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꺼렸습니다. 이른바 잘 나가는 사람, 복 받은 사람 옆에 있어야 콩고물이라도 얻어먹지, 박복한 팔자 옆에서 덤터기를 쓸 이유가 없으니까요. 아무튼 신의 보살핌을 받고 호의를 받는 사람이라면 모름지기 오복을 누려야 한다는 것이 세상의 시각이었습니다.
복되신 분
그런데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복’은 전혀 뜻이 다릅니다. 오월 성모성월은 로사리오 성월과 더불어 성모송을 가장 많이 바치는 달이니만큼, 신앙인들은 “여인 중에 복되시며”를 자주 입에 올립니다. 그런데 ‘복되신 여인’ 마리아의 삶은 세간에서 생각하는 다복함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결혼 전에 아이를 낳았고, 남편과는 일찍 사별했으며, 하나뿐인 아들은 출가 3년 만에 대역죄인으로 처형당합니다. 참척의 고통입니다. 요즘 같으면 남편 복도 자식 복도 없다고 할 인생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도 세상의 복으로 치자면 영 박복합니다. 목수 아들로 구유에 태어났으니 요즘 말하는 금수저는 확실히 아닙니다. 그뿐이겠습니까?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루카 9,58)없는 고달픈 생활을 하시다가 끝내 갖은 수모와 모욕을 겪고 십자가형을 당합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복은커녕 저주받은 삶에 가깝지요.
내 사랑하는 아들
그런데도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또 수난을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가기 직전 산에서 변모하실 때 하늘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한결같았습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태 3,17)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아들이라면, 성부께서는 성자에게 빛나는 옥좌를 주셔야 했습니다. 발끝에 먼지 한 톨 안 묻도록 금이야 옥이야 키우셔야 했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말이지요.
그런데 성부께서는 성자에게 ‘오복’을 주지 않으시고 다른 것을 주셨습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마태 11, 27) 재물로 치자면 지지리도 가진 게 없는 예수께서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주셨다”고 말씀하신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세상의 기준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아버지의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다”(요한 17,16)는 강력한 믿음과 신원 의식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다 내 것이다”(요한 16.15)라고 선언하게 했습니다. 그리하여 “아버지와 나는 하나”(요한 10,30)라고 말씀하시는 예수께서는 그 어떤 곤경과 수난, 심지어 십자가의 죽음까지 받아들이면서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가 23,46)라고 하실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당신과 하나라고 단언할 수 있는 이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것’이었죠.
변덕스러운 신의 비위를 맞추고 환심을 사는 것이 성공의 길이라고 믿던 사람들에게, 그래야 다른 사람들이 부러워할 복 받은 인생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던 사람들에게 예수께서는 전혀 다른 세계를 열어주신 것입니다. 진정으로 사랑받은 사람은 내가 만들어 내는 성과나 업적, 능력에 상관없이 자신이 귀하고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내가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심지어 어떤 잘못을 하더라도 나를 사랑해 주고 품어주는 분이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보다 더 크고 중요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성모님이 복되다고 한 것도, 아들 예수께서 세상 높은 자리를 맡았다거나 큰 재산을 일구어서가 아니지요. 성모송이 알려주는 것처럼,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되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복되게 해주시는 그 사랑, 예수께서는 바로 그 사랑을 우리에게 알게 하려고 오시는 분을 증언하십니다. 성령이신 하느님 말씀입니다.
성령 강림 대축일
그래서 예수께서는 “보호자께서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요한 16,15)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남보다 더 많은 재산과 더 높은 지위를 가지면 ‘복 받았다’라고 하겠지만, 그런 판단에 휘둘리는 삶은 고단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평가와 기준에 스스로를 계속 견주면서 줄달음치는 삶을 살라고 세상에 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신앙인이 진정 복 받았다고 할 수 있는 삶은 우리에게 주어진 사랑을 믿고, 또 받은 사랑을 베풀 줄 아는 삶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떤 순간에도 가없는 사랑을 부어주시는 하느님과 함께 주어진 길을 가다가 결국에는 그분의 식탁에서 영원한 일치의 기쁨을 누리도록 초대받았다는 것이 삶의 진리입니다.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지닐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요한 16, 13)
우리 레지오 단원들은 어떠십니까? 예수께서 그러셨듯이, 다른 무엇보다도 ‘사랑받음’을 소중한 선물로 받아들이십니까? 아니면 박복한 현실을 한탄하십니까? 자녀들에게나 다른 이들에게 내가 받았던 사랑을 전해주고 계십니까? 아니면 다른 것들, 그러니까 세속의 성공을 이끌어 주느라 정작 사랑에는 소홀하지 않습니까?
혹시 사랑을 믿고 증거하기에 자신이 부족하다 생각하신다면, 이번 성령 강림 대축일에 더욱 간절히 기도해 봅시다.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로 힘을 얻어서 사랑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출 수 있도록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