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팬데믹은 교회의 대처 능력을 넘어서는 큰 위기였습니다. 2020년 봄 팬데믹이 처음 선언되었을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막막했습니까? 어떻든 우리 교회는 이때 소극적인 역할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걱정스럽게도 전문가들은 이와 유사한 보건 위기가 앞으로도 빈번히 일어날 것이라 합니다. 그래서 뭐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바쁩니다.
지혜로운 이들은 이런 시기에 마음만 바빠할 게 아니라 냉철한 성찰을 통해 지난 사태에서 교훈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래서 저도 잠시 바쁜 마음을 다스리고 팬데믹이 우리에게 준 교훈을 성찰해 보려 합니다.
자기 신앙생활의 주인 되기
팬데믹으로 미사가 중지되었을 때 신자 대부분이 당황했습니다. 공황상태에 가까운 당혹감이었습니다. 미사가 신앙생활의 전부인 신자들은 당혹감이 더 컸습니다. 미사가 신앙생활에서 교리적으로나 신학적으로나 중심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인정하는 바입니다. 그런데 이는 중심이지 전부가 아니라는 점은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평소의 신앙 태도가 팬데믹 상황에서 각기 다른 대응으로 나타났습니다. 첫째 부류는 교회의 안내에 따라 즉각 방송 미사, 유튜브 중계 미사에 참례하거나 대송을 바치는 선택을 했습니다. 둘째 부류는 신앙생활을 잠시 쉬는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잠시 쉬다 팬데믹 단계가 낮아지거나 종식되면 돌아온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셋째는 이참에 교회를 아예 떠났습니다. 그동안 기회만 보고 있었는데 이제 뭐라는 이조차 없으니 완전히 발을 끊은 것이었습니다. 이 가운데 둘째 선택을 한 신자는 대부분 돌아왔습니다. 물론 첫째 선택을 한 신자 가운데서도 둘째 셋째로 간 이가 드물게 있습니다.
이 결과는 평소 신앙 태도가 위기의 시기에도 그대로 이어진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평소 기도 생활에 충실하고 신앙과 일상을 일치시키려 노력한 신자들은 위기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았습니다. 미사가 중지되어도 그에 상응하는 신앙 실천을 계속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성직자와 수도자에 기대지 않고 평신도 스스로 신앙생활을 영위하는 자세는 위기 때 더 빛납니다. 레지오 단원은 매일 묵주기도를 바치는 것이 몸에 뱄습니다. 위기가 와도 기도를 쉬지 않습니다. 몸에 밴 습관의 힘이 이토록 강합니다. 이렇게 다른 신앙생활의 좋은 가치와 행위도 몸에 익히면 어떤 위기도 극복할 수 있는 강한 힘을 길러 줄 것입니다.
모든 것에 열린 태도
레지오 단원은 고령자가 많아 팬데믹 시기에 새로운 디지털 소통 기술을 받아들이는 데 소극적이었다고 들었습니다. 실제로 이런 태도가 영향을 주었는지 레지오 단원의 활동이 중년 이하의 연령대 신자들만큼 활발하지 않았습니다. 생물학적 나이가 확실히 행동과 의식에 영향을 준 셈이지요. 그러면 이런 태도가 언제나 당연한 일이어야 할까요?
저는 당연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뇌과학자와 의사들은 생물학적 나이와 무관하게 두 가지는 의식적인 노력을 통해 계속 변화시킬 수 있다는 데 동의합니다. 하나는 지적인 능력이고 다른 하나는 근력(筋力)입니다. 지적인 능력은 뇌의 가소성(可塑性, plasticity)과 연결됩니다. 뇌는 유연하고 탄력적이어서 나이가 들어도 지적 작업을 통해 계속 발달시킬 수 있다고 합니다. 근력은 말 그대로 근육의 힘입니다. 근육도 쓸수록 발달하고 강해집니다. 나이와 무관합니다.
나이가 들수록 육체의 한계가 정신의 한계가 되는 게 자연의 이치라 믿고 싶어 하는데 이것도 늘 맞는 말이 아닙니다. 이 두 가지가 잘 되면 나이가 들어도 젊은 사람처럼 새로운 기계와 기술에 잘 적응할 수 있습니다. 다른 일에도 훨씬 열려 있게 됩니다. 같은 나이에도 누구는 봉사를 하는데 다른 누구는 누워서 그에게 봉사를 받는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런 차이를 만드는 것은 아주 단순한 결단입니다. 즉 나는 봉사할 것인가 봉사를 받을 것인가를 선택하는데 달린 것입니다.
이 시대는 생물학적 나이보다 ‘인지적(認知的) 나이’가 중요합니다. 인지적 나이는 마음으로 생각하는 나이입니다. 내 나이가 80이어도 마음은 40, 50이라 생각하는 것이 인지적 나이입니다. 이렇게 나이를 생각하면 생물학적 나이와 무관하게 그 나이의 열정으로 살 수 있습니다.
봉사 정신의 회복
교회가 신자뿐 아니라 같은 지역,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까지 돌보는 일을 공공(公共)적 역할이라 하였습니다. 신자들 대부분은 이 공공적 역할이 교구나 교회 상층부가 해야 할 일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면 교회에서 유급으로 일하는 사회복지사나 직원들의 역할이라 생각하지요. 아쉬운 점은 신자들이 이런 일을 전문가의 일로만 생각하고 정작 자신은 아무 역할도 하지 않으려 하는 것입니다.
신학자들은 레지오 마리애가 한국교회가 지금처럼 성장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평신도 사도직 단체라 평가하는 데 이의가 없습니다. 저도 이 평가에 동의합니다. 그러면 레지오의 어떤 면이 이런 기여를 했을까요?
저는 레지오 단원이 매주 의무적으로 하는 두 시간의 활동이 큰 기여를 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청년 활동할 때를 돌이켜보면 당시 레지오 단원들은 신자뿐 아니라 지역의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데 적극적이었습니다. 본당에서도 지역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러던 것이 나라가 잘살게 되면서 이 역할을 전문인에게 맡기기 시작했습니다. 그에 따라 신자들은 이런 일을 자신의 역할이 아니라 국가의 역할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코로나 시기에 국가도 손을 쓸 수 없는 일이 많았는데 이때 레지오 단원의 역할이 적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레지오는 감염 고위험군에 속한 고령자가 많은 단체이기 때문에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사람과의 접촉이 중요한 시대입니다. 육체적 돌봄 못지않게 정신적, 영적 돌봄의 영향이 큽니다. 이는 레지오 단원이 기도와 만남으로 큰 기여를 할 수 있는 영역이기도 합니다. 여기에는 직접 만나지 않고 전화로 카톡으로 돌봄을 실천하는 일도 포함됩니다.
실천으로 이어져야 할 교훈
머리로는 이해가 되었는데 실천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이는 제대로 교훈을 얻은 것이 아닙니다. 개인이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요즘 아쉬워하는 것이 교회의 이런 모습입니다. 성찰도 부족하고 이 성찰에 바탕을 둔 실천도 거의 하지 않습니다. 부디 레지오 단원만이라도 이런 성찰과 성찰에 바탕을 둔 실천에 앞장서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