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레지오를 처음 접한 건 초등학교 1학년 때였다. 초등부 주일학교가 일찍 끝난 어느 날 작은 누나가 있는 레지오 회합실에 따라 들어갔다. 중앙에 성모상을 모시고 남녀학생 열 명 정도가 열심히 묵주기도를 바치고 있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기도가 안 끝나 지루하던 터에 창문 밖에서 친구 녀석이 손을 흔들어 불러냈다. 장충단 공원에 축구하러 가자는 것이었다. 그러잖아도 회합실에 앉아 지루함에 몸을 비비 꼬던 터라 냉큼 친구를 따라나섰다.
“그런데 저기는 뭐 하는 곳이야?”
“작은누나가 레지오라고 하는데 잘 모르겠어. 성모상을 모셔놓고 묵주기도를 하고 있더라고.”
“너도 묵주기도 할 줄 알아?”
“아니 모르지.”
“내년에 첫영성체 반에 가면 수녀님이 묵주기도를 가르쳐준다고 하더라, 기도문도 다 외어야 하는데 못 외우면 떨어진대.”
“떨어지면? 그럼 어떻게 해?”
“나도 잘 모르지만 다음 해에 또 시험 보겠지.”
“학교 시험처럼 보는 거야?”
“우리 형이 그러는데 신부님 앞에서 외워야 한대.”
“뭐? 신부님 앞에서 혼자?”
나는 첫영성체 반에 들어가려면 아직 일 년이나 남았는데 숫기가 없어서인지 그때부터 떨리는 마음이 들었던 기억이 난다.
어머니는 늘 동생과 내가 잘 이불을 펼쳐주시고 잠자리에 들면 성모상 앞에서 작은 촛불을 켜놓고 기도하셨다. 그 기도가 묵주기도인 것을 새삼 알게 되었다. 나는 어머니의 기도가 끝나기 전 잠이 들었다. 어머니가 기도하시는 동안 우리 형제가 스스르 잠드는 모습을 상상해 보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리고 우리가 다음날 일어날 때도 어머니는 묵주기도를 하고 계셨다.
언제 어디서든 묵주기도를 바치셨던 어머니
어머니가 반복적으로 하시는 성모송을 자꾸 듣다 보니 어느새 저절로 외우게 되었다. 묵주기도는 성모님께서 가장 기뻐하는 선물이니 어머니도 열심히 기도하셨던 것 같다. 그리고 언제 어디서라도 바칠 수 있는 기도이기에 어머니는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에 늘 묵주기도를 하셨다.
한국전쟁 때 아버지가 군에 입대하셔서 8년 동안이나 가장으로 어린 두 딸과 아들을 부양해야 했다. 아직 젖먹이였던 형을 업고 옹기를 머리에 이고, 이른 새벽 산길을 넘어 다른 마을로 갈 때 유일한 벗은 묵주기도였을 것이다. 어머니도 언젠가 그때를 회고하면서 어떤 날은 멀리 가서 집에 아주 밤늦게 돌아와야 해서 위험도 많았다고 하셨다. 어머니는 여섯 살, 세 살의 딸을 집에 두고 장사하러 다니며 걱정이 많았는데 무탈하게 지낸 것도 성모님이 보호하신 덕분이라 하셨다.
내가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갔을 때 예수님을 잉태한 성모님이 친척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을 찾아갔던 지역을 보니 유다 산골이고, 성모님의 여정은 험한 산길이었다. 내 어머니가 그 험한 길을 몇 년 동안 혼자 걸어가셨으리라 생각하니 목이 메었다. 지금도 묵주기도 때 환희의 신비 2단 ‘마리아께서 엘리사벳을 찾아보심을 묵상합시다’에서는 산길을 걷는 20대 중반의 젊은 어머니가 머리에 수건을 얹은 채 옹기를 이고 산길을 오르는 장면이 떠오른다.
한번은 명절 때 막내 삼촌이 어머니에게 “형수님은 매일 같이 열심히 묵주기도를 하시는데 혹시라도 성모님을 본 적이 있으세요?”라며 농담 반 진담 반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어머니는 씨익 웃으시며 “가끔 뵙죠”라며 웃어넘기셨다. 나는 아주 오래전에 들은 어머니의 말씀인데도 지금까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호기심에서라도 나는 어머니께 “성모님은 어떻게 생기셨어요? 뭐라고 말씀은 안 하셔요?”라고 물어보았을 텐데 이상하게도 전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꼿꼿했던 어머니의 기도하는 자세가 점차 구부정한 자세로 바뀌어 가는 것을 보게 되었을 때 시간의 흐름을 깨닫게 되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신 아침에도 보통 때와 똑같이 일어나셔서 세수하고 묵주기도를 바치고 나서 방에 누우신 다음 돌아가셨다. 어머니가 이 세상에서 드린 마지막 드린 기도는 묵주기도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다음 날 입관할 때 내 주머니 속 묵주를 꺼내 어머니 손에 쥐어드리며 “어머니 이 세상에서 평생을 묵주기도 하셨는데 천국에서도 불쌍한 죄인들을 위해 기도해 주세요.”하고 손에 감아드렸다.
성모님은 우리 신앙인들의 보호자
누나들도 나이가 들면서 어머니가 기도하는 방식을 따라 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식들이 자신도 모르게 부모를 닮아가는 것이 신비롭게 느껴진 적도 있었다. 어머니는 달력에 동그라미를 쳐서 환희의 신비, 고통의 신비, 영광의 신비를 약어로 서놓으셨다. 누나들도 어머니를 따라서 그대로 하고 있었다.
어머니도 외할머니가 묵주기도를 하시는 모습을 보고 그대로 따라 하셨을 것으로 생각한다. 외할머니는 모든 일을 끝내고 잠자기 전 호롱불마저 꺼지고 캄캄한 밤에 묵주기도를 드렸다. 세상을 떠나시는 날도 저녁 식사 후 청소와 설거지까지 다 끝내고 묵주기도를 하는 중 앉은 채로 선종하셨다.
내가 어렸을 때 들었던 한 친척 아저씨의 말씀이 재미있었다. 한국전쟁 때 북쪽에서 내려오는 민간인들도 미군이나 한국군들이 짐 검사를 하고 수색을 하는데 묵주를 보여주면 무사통과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 아저씨 말씀이 공산당원이나 북한군들이 민간인 복장을 하고 몰래 섞여 있는 경우도 있어 자신들의 정체가 들키게 되면 도망치다 총격을 당하는 것을 여러번 목격하셨다고 한다. 그 아저씨는 성모님이 자신의 목숨을 여러 번 살려주셨다고 이야기를 하시곤 했다. 성모님은 우리 신앙인들의 보호자라는 사실이 잘 이해되는 대목이다.
지금도 잠을 잘 때 어머니가 묵주기도 하는 장면을 떠올리면 마음이 안정되고 편안해진다. 여전히 하늘나라에서 죄인인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 주신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