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총이었네1
모든 것이 주님의 은총
김봉대 세례자 요한 청주 모든 성인의 모후 Co. 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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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매우 가난한 시골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매우 가난했지만, 못 배운 것이 한이 되어 자식이 공무원이 되는 게 소원이라며 빚을 져 가면서도 나를 고등학교까지 보내주셨다. 그러나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도 제대로 된 직장 하나 잡지 못하고 오랜 세월 방황했다. 하는 일마다 실패를 거듭하다 보니, 절망의 늪에 빠졌고, 쉽게 그곳을 빠져나오지 못했다.
1980년 아내와 결혼하고 부산에서 살았는데, 양가 부모님이 모두 편찮으셔서 시골로 이사와 부모님 대신 농사를 지으면서 부모님의 건강을 돌봐 드렸다. 다행히 건강은 많이 좋아지셨지만, 농사는 갈수록 빚만 늘어날 뿐 희망이 없었다. 1985년 1월 19일 겨울날, 울적한 기분을 달래려고 무작정 대전행 버스를 탔는데, 한참을 졸다가 옥천시외버스터미널이라는 간판이 보이는 순간 아무런 생각 없이 그냥 버스에서 내렸다. 
그것을 계기로 한 번 와 본 적도 없고, 아는 사람 없는 충북 옥천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는데 아무리 돌이켜 보아도 내 의지와는 전혀 관계없이 이루어진 묘한 일이다. 낯선 땅 옥천에서 식당을 개업하고 2년 반 동안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1987년 여름날 어떤 사람이 천사처럼 식당에 나타나 밥을 먹으면서 얼마 후에 의료보험조합 공채 시험이 있으니 한번 응시해 보라고 했다. 그래서 군청 게시판에 가 보았더니 정확하게 15일 후에 시험이 있다는 공고가 붙어 있었고 다행히 원서 접수 기한이 내일까지였다. 부랴부랴 원서를 제출하고 헌책방에 가서 책을 사서 보름 동안 공부하여 응시했는데 36세라는 당시 응시자 중 최고령의 나이로 공채 시험 합격이라는 꿈같은 행운을 얻었다. 
나는 아내와 손을 맞잡고 춤을 추면서 기쁨의 눈물까지 흘렸다. 나의 합격 소식을 듣고 가장 기뻐하셨던 분은 우리 부모님이었다. 그 오랜 세월 동안 마음속으로 얼마나 애태우셨을까 생각하니 너무 죄송스러웠다. 한편으로는 많이 늦긴 했지만 그래도 많이 좋아하시는 부모님을 보니 부모님께 효도한 것 같아 너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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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겪은 고통과 시련은 축복을 주시고자 주신 십자가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천주교 신자였던 아내가 냉담 중이라는 생각을 했고, 이후 신기하게도 아내가 냉담을 풀고 성당에 다니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신자도 아닌 내가 부산으로 내려가 아내가 다니던 성당을 찾아가 아내의 교적을 옥천성당으로 옮겨왔고, 이후 우리 가족 모두가 세례받고 성당에 다니는 축복을 받았다. 세례받고 성당에 다닌 지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성당에서 성체 조배를 하며 묵상하고 있는데, 문득 지난날 내가 겪은 어렵고 힘든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순간, 내 입에서 아! 하는 탄성이 나도 모르게 터져 나왔다. 
그 순간 나는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주님,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라고 울면서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그동안 내가 겪은 많은 시련과 고통은 주님께서 나에게 더 큰 은총과 축복을 주시고자 지워주신 십자가였고, 주님께서는 절망감에 빠진 나를 당신의 도구로 쓰시기 위해 부산에서 고향 시골로, 그리고 다시 옥천으로 인도하시고, 세례를 통하여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셨으며, 또 안정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의료보험조합이라는 직장에 합격시켜 주시고, 월세방을 전전하던 내가 내 아파트를 마련하게 된 이 모든 것이 주님의 은총이었다.
그래서 그날 나는 주님 앞에서 작은 서약을 했다. 어떤 경우에도 결코 냉담하지 않겠다는 것과 성당에서 어떤 일이 주어져도 절대 거부하지 않고 순명하겠다는 서약이다. 이제 내 나이 72세가 되다 보니 갈수록 열정과 감각은 예전에 비해 훨씬 떨어지지만, 지금도 이 서약만큼은 잘 지키고 있다. 이제는 잠시라도 주님과 성모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몸이 된 것이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
주님께서 주신 수많은 은총 중 가장 감사한 은총과 축복은 천주교 신자인 제 아내와 부부로 짝을 맺어주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가족 모두가 세례받고 당신의 자녀가 되어, 늘 주님을 찬송하며 주님 안에서 기쁨과 평화를 누리며 살게 된 것이다. 나는 이제 하느님을 아버지로, 성모님을 어머니로 두고 살고 있으니, 세상에서 백이 제일 좋은 사람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세례를 통하여 나를 당신의 아들로 삼아주시어 어떠한 악의 유혹도 이겨낼 수 있도록 지켜 주시고, 성모님 역시 나를 레지오라는 울타리 안으로 끌어들여 지켜 주시며, 나의 모든 바람을 아버지께 전구하여 주시니, 이보다 더 큰 은총과 축복이 어디 있겠는가? 이는 천주교 신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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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성모님! 감사합니다. 찬미 영광 받으소서
며칠 전 아치에스 행사를 통하여 성모님께 나 자신을 온전히 봉헌하고 충성을 다짐하면서 성모님으로부터 한 해 동안 악의 세력과 맞서 싸울 힘과 축복을 받았다. 매년 5월 성모성월이 되면 ‘성모의 밤’에 여러 번 성모님께 드리는 글을 써서 바치곤 했는데, 올해는 내가 잘할 수 있는 아코디언 연주로 성모님을 찬송하고 싶다. 나는 1993년 부활 때 세례를 받은 이후 곧장 레지오에 입단하여 단원으로 열심히 활동하다 보니, 레지오 단원이 된 지 2년도 안 되어 꾸리아 단장을 맡았고, 이후 꾸리아 단장을 1번 더했고, 지금은 꼬미씨움 단장직을 2번째로 맡아 봉사하고 있다. 그리고 레지오 단원 교육위원을 수년간 해왔으나 작년에 건강을 잃으면서 사임했다. 
레지오 활동 외에도 본당 평협회장을 비롯한 여러 단체장을 맡아 지금까지 30여 년간을 봉사해 왔지만, 돌이켜 보면 너무도 어리석고 부족했다는 점을 결코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만약 주님과 성모님을 몰랐다면, 나는 지금쯤 세속의 유혹에 빠져 얼마나 타락된 인생을 살고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할 때마다 정말 주님과 성모님께 감사하고 또 감사하는 기도를 바치며 살고 있다. 
요즘 한 가지 걱정이 있다면 누구보다도 나를 좋아하시는 우리 어머니가 갑자기 정신 줄을 놓으셨다. 98세의 연세 탓도 있지만, 며칠 전만 해도 “난, 우리 아들하고 우리 며느리가 제일 좋아”라고 하시면서 몇 번이고 손을 쓰다듬어 주시던 분이 나를 보고 갑자기 “누구세요?” 하고 물으신다. 이별은 언젠가 한 번은 겪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해 왔지만, 막상 아들, 며느리를 몰라보는 어머니를 보니 갑자기 슬퍼지면서 눈물이 난다.
나는 평생 건강에 자신 있었지만 면역력이 떨어져 작년 봄 갑자기 패혈증과 폐렴으로 쓰러져 중환자실에서 산소 호흡기에 의지한 채 사경을 헤맸다. ‘이제 나는 죽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모든 것을 주님과 성모님께 맡기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주님과 성모님께 기도했다.
“주님! 제 몸을 당신께서 맡기오니, 주님 뜻대로 하소서! 그러나 자비를 베푸시어 저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소서.” 하고 기도했다. 그리고 성모님께 저의 죄를 용서받을 수 있도록 주님께 전구하여 달라고 기도했다. 그랬는데, 주님께서는 정말 감사하게도 저를 다시 살려주셨다. 지금은 예전의 건강을 거의 회복하였다. 이제 주님께서 다시 살려주시어 덤으로 살고 있으니,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늘 감사하는 삶을 살고 싶다. 주님, 성모님! 감사합니다. 찬미 영광 받으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