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터전 – 제주교구 중앙주교좌성당(1)
제주교구 125년 역사의
신앙 못자리
안창흡 프란치스코 제주 Re. 명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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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순례 신축화해길을 걸어 제주시 중앙로에 들어서면 우뚝, 눈에 들어오는 고딕식 종탑, 중앙주교좌성당(주임신부 김석주 베드로)이다. 100년을 넘어 4반세기를 보탠 역사를 지닌 가톨릭 신앙터를 바라보면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 이끄신 125년 역사를 느끼며 머리 숙여 두 손 모은다. 
제주 첫 본당 중앙성당은 1899년 4월 22일 설립되었으며, 올해 125주년을 맞았다. 제8대 조선교구장 뮈텔 주교가 1899년 4월 22일, 페네 신부와 김원영 새 신부를 제주에 파견한 이날이 바로 제주본당 설립일이다. ‘페네 신부와 김원영 신부는 5월 23일에 제물포를 출발해 목포를 거쳐 26일에는 제주 산지항으로 입항, 5월 28일에 첫 미사를 드릴 수 있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제주천주교회 100년사’ 참조)
성당과 사제관으로 사용할 집을 1,550냥에 매입해 입주한 게 6월 14일이었다는 것을 보면 매입 과정이 녹록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허름한 이 집이 제주교구 125년 역사를 가능케 한 신앙의 못자리이다. 
본격적인 전교 활동이 이뤄지면서 1900년 5월경에는 신자 20명, 예비신자 30명에 이르렀고, 제주, 서귀포, 한림지역까지 손길이 펴졌다. 1900년 5월 4일 라크루 신부가 제주본당 2대 주임으로 부임하자 김원영 신부는 라크루 신부와 의논 후 6월 12일 터를 닦아둔 산남지역 한논으로 거처를 옮겨 제주본당의 첫째 자본당 한논본당 설립으로 이어졌다.
1901년 5월경 정의·대정군에 신자수 137명, 예비신자 620명으로 증가할 즈음 터져 나온 사건이 신축교안이다. 5월 초부터 6월 말까지 이어진 교안으로 인해 당시 1,000여명으로 추산되는 신자 가운데 적어도 300∼350명가량이 희생된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신축교안 이후 급감했던 신자수는 1903년 초부터 회복세를 보이기 시작해 1910년 봄, 제주 207명, 홍로 195명 등 총 402명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볼 때 교안 이전 수준으로 돌아왔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1910년 한일합병 후에 조선교구가 경성교구(현 서울교구)로 명칭이 바뀌고, 분리 설립된 대구교구가 경상도와 전라도를 사목 관할로 두게 되어 제주 역시 대구교구 관할이 되었다. 1911년에는 제주 교회 예비신자가 1,500명에 이르고 있음을 대구교구장 드망드 주교의 제주 사목순방 보고서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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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12월 25일, 고딕식 적벽돌조 성당 지어 봉헌
그러다가 제1차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부터 성장세는 위축되었다. 라크루 신부 역시 고국 프랑스로부터 군 소집 명령을 받고 제주를 떠나야 했다. 1915년 6월, 김양홍 스테파노 신부가 제주본당 제3대 주임으로 부임했다. 하지만 1년도 되기 전에 경상도 지방으로 떠난 후 제주본당 주임은 임명되지 않음으로써 약 10년간 ‘주임신부 없는 시기’를 지냈다. 1년에 두 차례 목포 산정동본당 주임으로 옮겨간 타케 신부가 제주를 방문해 신자들을 돌보아 주는 정도였다.
일제 강점기 밀항, 타국 이민 등 제주지역 사회 현상은 교회 사정을 더욱 어렵게 했다. 그러는 중에 1922년 주재용 바오로 신부가 목포 산정동본당 겸 제주본당 제4대 주임으로, 최덕홍 요한 신부는 보좌로 임명됐다. ‘공소 같은 본당 시기’를 지나 겸임신부 시기가 도래한 셈이다. 이같은 상황은 1926년 5월 31일 자로 이필경 안드레아 신부가 제5대 주임 신부로 임명되면서 해소되었다. 1927년 제주 신자수는 340명(제주 200·홍로 140)에 이를 만큼 회복세가 뚜렷했다. 
1929년 5월에 최덕홍 요한 신부가 제6대 주임으로 임명되었다. 같은 해 8월 11일에는 ‘자녀 교육에 혁신적으로 노력해 제주도의 문화 발달에 공헌이 많았던 제주도문화의 은인 신부’라 칭송되던 제2대 주임 라크루 신부의 선종 소식이 전해지면서 신자는 물론 지역 외교인들도 함께 모여 추모미사를 봉헌하고 추도식을 가졌다.
부임한 이후에 외교인들이 입교하는 추세를 볼 때 새 성당을 지어야겠다는 계획을 세운 최덕홍 요한 신부는 신자들과 함께 노력을 기울여 1930년 12월 25일, 고딕식 적벽돌조의 성당을 지어 봉헌식을 올렸다.
1931년에는 대구교구에서 전라도 감목대리구가 분리 설정되어 성 골롬반외방선교회에 맡겨졌으며, 제주 역시 그 관할로 들어갔다. 1934년 3월 8일, 골롬반회 선교사들이 사목을 맡게 되면서 드망드 주교는 4월 1일자로 골롬반회 도슨(Patrick Dawson, 孫) 신부와 스위니(Augustine Sweeney, 徐) 신부를 제주본당 보좌로, 맥메나민(Daniel McMenamin, 明) 신부와 라이언(Thomas D. Ryan, 羅) 신부를 홍로본당 보좌로 임명했다. 이후 1936년 6월 29일을 기해 제주의 사목권이 골롬반회 선교사들에게 완전히 이양됨으로써 ‘골롬반회 사목시대’가 열리게 됐다. 도슨 신부는 제주본당 제7대 주임, 라이언 신부는 홍로본당 제10대 주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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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큰 변화를 맞게 되는데 1937년 4월 13일, 전남 감목대리구가 ‘광주교구’로, 전북 감목대리구는 ‘전주교구’로의 승격이다. 제주 교회는 중일전쟁이 발발한 1937년부터 더욱 심해진 일제 탄압에 시달렸다. 급기야 1941년 태평양전쟁이 일어나면서 일제는 골롬반회 소속 선교사들에게 적성국 출신이라는 딱지를 붙여 연금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제주본당 사목자 도슨 신부와 스위니 신부, 서귀포본당의 라이언 신부 등이 30여 명 지도층 신자들과 함께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했다. 제주 교회는 다시 목자 없는 교회로서 신자들은 사가에 모여 공소예절을 드려야만 했다.(기사 내용은 ‘제주 천주교회 100년사’ 및 중앙주교좌성당120년사 편찬위원장 유경익 비오·위원 이창준 시몬 자료 도움)
<사진설명(위로부터)>
- 제주교구 중앙주교좌성당
- (좌로부터) 라크루 신부가 매입한 첫 제주본당 사제관. 지금의 제주교구청과 중앙주교좌성당, 신성학원이 시작된 터/붉은 벽돌조 고딕양식 성당 신축 봉헌/최초의 천주교당터 표지석
- (좌로부터) 도슨, 스위니, 라이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