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2남 5녀중 넷째 딸로 태어났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아버지께서 몸이 약하시다는 이유로 무당에게 양아들을 삼고 일 년에 몇 번씩 떡과 돼지머리를 차려 무당을 불러 굿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농사를 짓고 나면 떡을 해서 여기저기 가져다 놓고 신령님께 빌곤 하였습니다. 아버지께서는 그런 모습이 싫었는지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자 할아버지께서 섬기던 모든 물건들을 불태워 버리셨습니다.
어머니께서는 고된 시집살이와 농사일을 하시면서도 옆집 할머니가 옷을 깨끗하게 차려입고 주일이면 성당에 가는 것을 몹시나 부러워하였습니다. 어머니께서는 나중에 커서 종교를 가지려면 천주교회를 가라고 늘 말씀하셨습니다.
무교로 살던 저는 지인의 소개로 남편을 만나 석 달 만에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남편은 불교 신자로 직장에서 법우회에 가입하여 활동하면서 후원금을 내고, 불교 서적을 배달하여 읽던 불교 신자였습니다. 반면 시어머니께서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습니다. 레지오 단원으로 매일 새벽미사, 성무일도, 성경 읽기, 9일 기도를 매일 바치시는 쁘레또리움 단원이셨습니다. 또한 연령회 회원으로 교우들의 염도 하셨고, 성당 화단에 풀도 뽑고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남편을 위해 성당과 성지에서 생 미사를 꾸준히 바치셨습니다.
한 가정에 종교가 다른 모습이 싫었던 저는 자라면서 친정어머니의 부탁도 있었기에 남편에게 절에 다니지 말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어려서부터 불교 신자였고 종교는 자신이 선택하여야 한다고 본인 주장이 강했던 남편이 의외로 순순히 내 말을 들어 주었습니다.
첫 번째의 시련과 성모님의 군단에 참여
어느 날 둘째 아들을 8개월 만에 조산했습니다. 아이는 폐렴 및 미숙아 중환자라 가망이 없다는 의사 선생님의 청천벽력 같은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자 레지오 단원이셨던 시어머님께서는 생 미사를 바치시고, 레지오 단원들과 함께 미숙아 중환자실 앞에서 한 달이 넘게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 헌신으로 아이가 완치되어 튼튼하게 자라니 의사 선생님께서도 기적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즈음 남편도 이유 없이 배가 아파 응급실에 실려 갔습니다. 일주일 동안 각종 검사를 하였지만 병명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갑자기 허리가 펴지지 않기도 해서 한 달 넘게 입원 치료를 했습니다. 의사도 이런 환자는 처음 보기에 병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말만 하셨습니다. 그러자 시어머니께서 저희 부부가 성가정을 이루는 것이 생의 마지막 소원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세례를 받고 몇 해가 지났을 무렵, 심적으로 힘들었던 저는 30분 걸리는 거리를 걸어서 새벽 미사를 갔습니다. 그곳에서 한 자매님을 만나 레지오 단원이 되고 싶다고 간절히 이야기했고, 자매님의 소개로 직장인이 활동하는 ‘온유하신 모후 쁘레시디움’으로 2001년 7월 3일 입단하게 되었습니다.
레지오에 입단하니 시어머니께서는 병원의 환자를 방문할 때 저를 데리고 다니셨고, 저는 성모님에 대한 온전한 순명과 인내심, 용기, 주님께 대한 사랑과 믿음으로 기도와 봉사를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단원 한 분과 함께 월요일이면 중증 환자 입원실에서 저녁 식사 봉사를 했습니다. 6개월 만에 회계를 맡았고, 그 후 서기, 꾸리아 회계를 하면서 레지오 단원으로서 기도와 봉사를 열심히 했습니다.
레지오 활동과 하느님의 은총으로 신앙심도 돈독해지고 경제적으로도 회복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남편도 2001년 세례를 받으면서, 주일이면 시어머니를 모시고 온 가족이 성당에 가서 주님을 만나는 성가정이 되었습니다. 남편도 레지오 단원과 사목회 임원으로 봉사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가정이 주님께 받은 은총이 너무 커 봉사할 수밖에
서울에서 대학에 다니면서 고시 준비를 하던 큰아들이 갑자기 쓰러져 실신하였다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저는 병원에 달려가면서 주님, 성모님 아들을 살려달라고 기도하면서 매달렸습니다. “주님 누구를 꼭 데려가셔야 한다면 아들은 안되고 저를 데려가 주세요”라고 애원했습니다. 주님과 성모님께 아들을 살려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면서 도착하니 아들은 다행히 별문제 없어 보였고, CT, MRI 검사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한 달에 걸쳐 심장을 비롯해 각종 검사를 한 결과 아들은 대학 공부와 취업 준비를 병행하다 보니 많이 힘이 들었는지 목 주변과 등 근육이 심하게 뭉치면서 머리로 통하는 신경을 눌러 일시적 쇼크가 왔다고 하였습니다. 다행히 하느님의 도움으로 이상이 없었던 것입니다.
몸과 마음이 힘든 와중에 꾸리아 단장으로 뽑혔습니다. 저는 제가 힘들었기에 단장을 할 수 없다는 이유로 사양했습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우리 가정이 주님께 받은 은총이 너무 많아 봉사하라는 주님의 뜻이 느껴져 다시 수락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원주 치명자의 모후 레지아 회계를 맡으면서 주님께서 저에게 주신 사명으로 생각하며 레지아와 세나뚜스를 오가며 레지오 단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지금 남편은 정년퇴직 후 레지오 단원으로 활동하면서 본당 사무장으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큰아들이 대학과 직장 생활을 할 때 큰아들이 성실히 성당에 다니는 모습을 보고 친구들이 성당에 다니고 싶다고 하여 입교, 영세하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대부도 섰습니다.
둘째는 먼 거리에서 직장 생활을 하면서 월요일이면 유연 근무를 신청하여 청년회 활동을 하면서 본인 스스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하지만 전례봉사도 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돌아가신 시어머니께서 늘 기도하시던 성모님 상을 저희 집 현관문을 열면 정면에 모시고 있습니다.
저희 집 가훈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1요한 4,12)입니다. 저희는 이처럼 하느님과 함께하며 그분의 사랑으로 하나 되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이 성경 말씀처럼 저는 본인의 성화와 이웃에 대한 봉사 활동을 통해, 우리 안에서 현존하시는 하느님과 성모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면서 레지오 단원으로서 봉사하며 살아가겠습니다. 아멘.
<사진설명(위로부터)>
- 고경란 가브리엘라
- 아치에스 후 순교자의 모후 Pr. 단원들과
- 원주 치명자의 모후 레지아 4간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