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에 즈음하여 어머니를 뵈러 짧은 휴가를 다녀왔다. 어머니는 얼굴 가득 기미가 드리운 내 얼굴을 볼 때마다 안쓰러워하셨었는데 이번에는 아무 말씀 안 하셔서 다행이다 싶었다. 그런데 조용히 올케언니에게 말씀하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에구, 이제는 시커먼 기미가 한 덩어리로 뭉쳐져서 얼굴을 덮었네. 워쩐다니?” 양 볼에 가득한 기미를 보시고 안타까워하시는 어머니께 나는 세상 밝은 미소로 웃어 보이며 말씀드렸다. “엄마, 깨끗한 얼굴보다 행복한 얼굴이 최고죠.”
티 하나 없이 깨끗한 얼굴은 예뻐 보인다. 그런데 그 얼굴에 어둠이 드리우고, 누군가를 판단의 시선으로 보고, 자기 생각에 빠져 다른 사람들과 생명을 볼 수 없다면 그 얼굴은 더 이상 예쁘지 않다. 경직되게 하고, 눈치 보게 하고, 질리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기미 가득하고, 주름 가득하고, 하얀 머리가 울쑥불쑥 드리워도 행복한 미소만 드리우면,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마주 볼 수 있고, 그들을 받아들이는 얼굴은 그 자체로 예뻐 보인다. 이것이 바로 쉽게 질리지 않는 예쁨, 매력, 아름다움이다.
언젠가 본 짧은 동영상에 예능인 정형돈 님이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한 것이 떠오른다. 그는 ‘아름답다’는 말의 의미가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지를 전하고 있었다. 놀랍게도 ‘아름답다’라는 말의 ‘아름’이 옛말에서는 ‘나, 자기(私)’를 뜻한다는 것이다. 사(私)는 개인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나’라는 뜻도 있다. 곧 우리 말에서 아름답다는 말은 ‘나답다’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나다운 것이 아름다운 것이다.
그런데 나다운 것은 어떻게 드러날까? 돌아가신 이어령 선생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답다는 건 하나의 목표예요. ‘나다워’라는 건 현실이 아니라 ‘이런 내가 되고 싶어’라는 지향점이야. 꿈과 이상, 정체성을 가지고 내가 되어가는 존재, 그게 결국 인간이에요. 나다움을 추구하는 사람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시도하는 사람이고, 무언가가 되어가는 존재야. … 나를 이미 결정해 놓으면 나다움이라는 건 없는 거야. 내가 되고 싶은 나를 설정해 놓고, 내가 되려고 하는 나가 곧 나야. 그게 곧 나다움이고. … 그게 인간이에요.”
이어령 선생님의 말씀에서 볼 수 있듯이 자기 삶에서 목표가 있는 사람, 꿈이 있는 사람,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끊임없이 묻는 사람, 꿈을 향하여 끊임없이 나아가는 그 사람이 바로 ‘나다운 사람’, ‘아름다운 사람’이다.
꿈을 향해 나아가는 그 사람이 바로 ‘나다운 사람’, ‘아름다운 사람’
최근에 나는 강의를 통해 다양한 많은 사람을 만나며 그분들에게 “어릴 적 꿈이 무엇이었나요?”라고 묻거나, 혹은 어린이들에게는 “우리 친구는 꿈이 뭔가요?”라고 물어봤었다. 그런데 대부분 어른의 경우 “기억 안 나는데요.”라고 반응하거나 아이들의 경우 “아직 없는데요”,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요.”라고 반응하였다. 정말로 안타까웠다. 사람들은 더 이상 목표 생각하기를 원하지 않고, 더 이상 꿈꾸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나다움’에 이르기를 원하지 않는 문화 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어 보인다.
꿈과 이상이 있다면 지금처럼 소비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목표 설정이 단지 지금 당장의 배부름에 있다면, 지금 당장의 안위에 있다면 그것은 꿈을 꾸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이 위기와 어두움을 딛고 올라갈 수 있는 희망의 사다리를 야금야금 부수어 지금 당장의 추위와 배고픔을 채우는 데 사용하고 있는 것 같다. 사다리는 변화에로 미래에로 꿈에로 나아갈 수 있는 도구이다. 이 기회를 우리는 지금 아무렇지 않게 불태우고 있다.
아이들을 사랑한다면서 그들의 미래를 신용카드 쓰듯 훔쳐서는 안 된다. 참으로 우리의 아이들을 사랑한다면 아이들이 꿈꿀 수 있도록 오늘 우리가 꿈을 꿀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꿈꾸는 사람은 지금 당장의 안위보다 미래를 향한 목표 설정을 할 수 있고, 사다리를 오르는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지구 공동의 집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우리, 더 나은 미래를 향하여 함께 꿈꿉시다!” 우리의 미래 세대를 위하여 우리 모두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꿈을 꾸며 사다리를 오르도록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