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의 샘2
부활의 증인인 교회와
성체성사
박용욱 미카엘 신부 대구대교구 사목연구소장

1. 의심 많은 토마스
독일 포츠담의 상수시 궁전에는 바로크 회화의 거장 카라바조가 그린 ‘성 토마스의 불신’이 걸려 있습니다. 요한복음 20장에 등장하는 예수님과 토마스 사도의 일화를 묘사한 그림입니다. 이 작품에서 부활하신 주님은 사도의 손을 직접 잡고 당신 옆구리 상처를 만지도록 이끄시고, 베드로와 요한 복음사가가 그 장면을 뚫어지게 바라봅니다. 카라바조는 의심을 버리지 못하던 제자에게 주님께서 부인할 수 없는 증거를 친히 보여주시는 장면을 그리면서, 믿음의 토대를 확실하게 보고 싶은 뭇사람들의 속내를 표현한 것 같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믿으면서 한편으로 긴가민가하는 신앙인들의 의구심을 대변하는 것이지요. 
카라바조가 묘사한 것처럼, 토마스 사도는 의심 많은 사람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영어 표현 중에 의심 많은 사람을 ‘의심꾼 토마스’(Doubting Thomas)라고 부를 정도입니다. 매사 꼬치꼬치 따지고 증거를 내놓으라고 다그치는 모습에서 어떤 이들은 토마스 사도를 합리적인 인물의 대명사로 여깁니다. 
열두 사도 가운데 한 분인 토마스 사도도 예수님을 직접 뵙기 전에는 그분의 부활을 믿지 않았으니, 하느님이 무슨 증거라도 보여주거나 확실히 자신을 설득할 무언가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믿음과 거리를 두겠다는 분들도 더러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다른 이들의 신앙생활을 우습게 여기거나, 신앙인들의 순수한 마음을 어리숙해서 그렇다고 낮춰 보기도 합니다. 신앙은 정서적으로 기댈 곳이 필요한 사람들에게는 유용하겠지만, 자신은 주관이 뚜렷하고 이성적이라 전혀 관심이 없다는 식입니다.

2. 불신의 이유
하지만 요한복음에서 토마스 사도가 예수님을 믿지 못했던 이유는 그가 대단히 합리적이고 명석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게 맞는다면 서구 지성사를 쥐락펴락했던 위대한 지성들이 죄다 무신론자여야 할 텐데, 사실은 그렇지 않지요. 토마스는 주님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자기 손가락을 넣어보고 그분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지 않고서는 결코 믿지 못하겠다고 했지만, 정작 예수님께서 만져보라고 했을 때 실제로 그분 몸에 손을 댔다는 언급이 복음서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단지 의심을 버리고 믿으라는 말씀에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신앙을 고백합니다. 그가 믿지 못했던 이유, 또 믿음에 이르게 된 이유는 다른 데 있었던 것 같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제자들은 문을 닫아걸고 모여 있었습니다. 행여나 스승처럼 잡혀가서 처참한 형벌의 희생자가 될까봐 떨고 있었습니다. 따르던 스승은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시고, 새로운 삶을 꿈꾸던 지난날이 한순간에 수포로 돌아갔다는 절망감이 그들을 짓눌렀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부르실 때만 해도 희망에 벅차서 그들의 생업마저 버리고 신나게 따라나섰건만, 이제는 뭘 해야 할지, 어디로 가야 할지도 알 수 없는 막막함 속에 있습니다. 
그 절망과 두려움의 시간 속에서 그들은 무엇을 했습니까? 전형적인 오합지졸의 모습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들은 함께 있었습니다. 그들의 막막함과 절망감을 함께 모이는 것으로 달래고, 위안을 얻었습니다. 그렇게 모인 곳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지요. 수난 이전의 예수님께서 당신 이름으로 둘이나 셋이 모인 곳에 함께 하시겠다는 바로 그 약속대로(마태 18,20) 예수께서는 모여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성령을 부어주시고 새로운 희망으로 가슴 뛰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용서에 대해서 다시 한번 가르치십니다. 예수님의 수난 과정에서 예수님을 배반했고 흔들리기도 했으며, 살아남기 위해서 뿔뿔이 흩어졌던 나약한 제자들이지만, 그런 과거에 발목 잡히지 않고 서로 용서하며 한 공동체를 이루어 가는 것이 곧 하느님 나라의 새로운 질서를 보여주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반면에 토마스는 다른 제자들과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혼자서 살길을 찾아서 밖으로 다닌 것인지, 아니면 지극히 현실적이라 재빨리 방향을 돌린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그는 혼자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자신과 동고동락했던 다른 제자들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형제들이 뭐라 증언하든, 예수님이 직접 자신을 설득하지 않으면 믿지 않겠다는 교만이 내비치고 있습니다. 그런 토마스가 예수님의 부활을 믿게 된 것은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모여 있는 곳에 합류한 다음이었지요. 자기가 불신했던 형제들, 고통스런 현실을 함께 나눌 수 없었던 형제들을 찾아가서 마음을 함께 나눈 다음에 비로소 토마스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하고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신앙을 고백하게 됩니다.

3. 부활의 증인이요 신앙의 양육자인 교회
우리는 신앙을 자기 힘으로 획득하지 않았습니다. 신앙이 책 몇 권 읽어서 얻어지는 것도 아니고, 면벽 수행이나 탁월한 덕행을 쌓음으로써 터득할 수 있는 삶의 이치도 아닙니다. 우리는 교회가 전해 준 신앙을 교회 안에서, 곧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배우고 익힙니다. 나약하고 흔들리는 우리가 하느님 앞에 나올 수 있는 것도 우리가 교회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우리 신앙을 기르고 양육하는 어머니이고 신앙의 길을 걷도록 가르치는 교사입니다. 그리고 성체성사는 부활의 증인이요 신앙의 양육자로서의 교회를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는 표징의 하나입니다. 
지난 2022년 발표하신 교서 ‘나는 간절히 바랐다’에서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죽은 이들 가운데서 되살아나 부활하신 분께서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을 위하여, 또한 물고기를 잡으러 돌아간 당신 제자들을 위하여 빵을 떼어 주실 때, 빵을 떼는 그 몸짓이 그들의 눈을 열어 줍니다. 그 몸짓이 십자가의 공포로 눈이 멀어 버린 그들을 치유하여, 부활하신 분을 ‘보고’ 그 부활을 믿게 해주었습니다. … 오순절 뒤에 우리가 어떻게든 예루살렘에 도착해서 나자렛 사람 예수에 대하여 알려고 할 뿐만 아니라 아직도 그분을 만날 수 있기를 바라더라도,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몸짓을 더욱더 생생하게 보려고 그분의 제자들을 찾아내는 것밖에는 달리 할 수가 없습니다. 그분을 기리는 공동체를 만나는 것 말고는 참으로 그분을 만날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교황 교서 ‘나는 간절히 바랐다’ 7, 8항 참고) 
어제 하루만 해도 세 분의 연락을 받았습니다. 암과 싸우는 환자 가족, 암으로 가족을 하느님 품에 보내드린 분, 또 다른 아픈 사연, 그런 연락을 받고 그분들을 위해서 미사를 봉헌하겠다고 약속드렸습니다. 그 약속을 듣는 분들도 한결 마음이 가벼워진 느낌이었습니다. 그렇게 함께 미사를 봉헌하고 마음을 함께하는 가운데, 우리는 신앙을 생각뿐만 아니라 온몸으로 배우고 터득해 갑니다. 전례력으로 부활 축제를 계속 지내는 사월 봄날에, 우리 레지오 단원들이 함께 모인다는 것의 의미를 더 깊이 새겨보시면 좋겠습니다. 서로의 아픔과 상처를 나누고 함께 기도하며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