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호성인 이야기
보살핌이 절실한 이들의
수호성인
이석규 베드로 자유기고가

자선활동의 수호성인, 성 빈첸시오 드 폴(축일 9월 27일)
20240313112248_848092132.jpg성 빈첸시오 드 폴은 16세기 말 프랑스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신학을 공부하고 20세 때(1600년) 사제품을 받은 성인은 어느 부인에게 기부금을 받으러 갔다가 돌아오는 배에서 해적에게 붙잡혀서 노예로 팔려갔다. 다행히 좋은 주인을 만나 그를 가톨릭 신앙으로 인도하고 종살이에서 풀려났다. 프랑스로 돌아온 성인은 종살이하던 시절에 겪은 고통과 아픔을 잊지 않았다. 그리하여 뜻있는 이들의 조언, 권유, 협조를 받아 가난한 이들을 돕는 한편으로 자신의 소명을 깨달아 가난한 이들을 위해 자신을 봉헌하기로 스스로 서원했다.
본당 사제로 일하면서는 본당 단위의 ‘애덕회’를 조직하여 본당 신자들과 함께 가난한 가정을 돕는 일에 힘썼다. 또한 어느 귀족 가문의 전담 사제로 일하면서는 그 귀족이 관할하는 배에서 노를 젓는 선원(죄수)들의 처우를 개선했고, 그들을 치료할 수 있는 병원을 세웠으며 영성적인 도움도 주었다. 그리고 시골의 가난한 농민들을 복음화하기 위한 ‘선교 사제회’도 설립했다. ‘라자로의 집’이라는 나환자 병원에서 생활한 까닭에 ‘라자로회’라 불리게 된 이 선교회의 사제들은 농민들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펼쳐나갔고, 농민들의 일이 많아지는 농번기에는 파리에 가서 신학을 공부하며 수도 생활에 전념했다. 성인은 또한 고아원을 세워 고아들을 돌보았고, 북아프리카의 그리스도인 노예들이 풀려나도록 도왔으며, 전쟁으로 고통을 겪는 이들을 위한 구호사업도 펼쳤다.
한편, 성인은 남편과 사별한 뒤 가난한 이들을 위해 봉사하던 과부를 알게 되어 그에게 시골 본당의 애덕회들을 방문하고 격려하는 일을 맡겼다. 그리고 이 과부와 그의 주변 상류층 부인들의 협조에 힘입어 ‘애덕 부인회’를 설립했다. 그들은 병원을 찾아 환자들을 돌보고 버림받은 아이들을 보살폈다. 이러한 봉사 활동을 계속해서 이어갈 수녀회가 필요하다고 본 성인은 ‘애덕의 수녀회’를 설립하고 이 과부를 초대 원장으로 임명했다. 이 과부가 바로 성녀 루도비카 드 마리약이고, 이 수녀회가 오늘날의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 사랑의 딸회’다.
이렇듯 가난한 이들을 보살피는 데서 자신의 소명을 찾고 인간의 고통과 비참함을 줄이는 데에 생애를 바친 성인은 오늘날에도 각종 자선 활동과 이러한 활동들을 펼치는 모든 단체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는다.

장애인들의 수호성인, 성 세르불로(축일 12월 23일)
20240313112248_1646669192.jpg6세기의 성 세르불로는 어려서부터 손발이 마비된 장애인이었다. 똑바로 설 수도 없었고, 몸을 이리저리 움직일 수도 없었으며, 손을 입으로 가져갈 수도 없었다. 어머니와 형제들은 성인을 로마의 성 클레멘스 성당 문 앞에 데려다 놓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게 했다. 성인은 이런 고통과 치욕을 겸손과 인내로 참아내며 늘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자신의 성화를 위해 힘썼다. 
글을 읽지 못하던 성인은 경건한 이에게 성경을 읽어 달라고 부탁해 하느님의 말씀들을 들으며 마음에 새겼다. 그리하여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가와 감사 기도를 노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때부터 성인은 자기에게 희사하는 사람들에게 찬미가며 시편을 노래로 들려주었고, 사람들은 성인의 노래를 ‘천국에서 들리는 신비로운 음악’으로 들었다. 그런가 하면 성인은 자신에게 필요한 최소한의 것을 뺀 모든 것을 더 궁핍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성 대 그레고리오 1세 교황은 590년경에 선종한 성인을 두고, 부잣집 문 앞에 있던 라자로에 비교하며(루카 16,19-31 참조) 고통 중에 살았으나 늘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가난한 이들에게 가진 것을 나누어주었기에 천사들의 노래를 들으며 천국의 영광으로 들어갔다고, 성인의 이러한 생애는 건강하고 부유하지만 선을 행하지 않는 이들에게 경종을 울린다고 칭송했다. 이때부터 성인은 장애인들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아 왔다.

노숙인들의 수호성인, 성 베네딕토 요셉 라브르(축일 4월 16일)
20240313112248_909797028.jpg성 베네딕토 요셉 라브르는 18세기에 이탈리아에서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성인은 여러 차례 수도회에 입회하고자 했으나, 성격이 너무 신중하다거나 또는 건강에 문제가 있다거나 하는 이유로 번번이 거절당했다. 수도 성소가 자신의 길이 아니라고 생각한 성인은 로마 순례에 나서 기도하고 구걸하며 맨발로 걸어서 갔다. 그리고 서유럽의 여러 성지들도 순례하며 깊은 감동을 받았다.
성인은 어디를 가든 맨발로 걸어 다녔고, 밤이면 노천이나 건물의 처마 아래에서 묵었다. 누더기 옷을 입고 지저분한 몸으로 문전 걸식을 하면서도 약간의 돈이라도 생기면 다른 사람에게 주었다. 성인은 말을 적게 하는 대신에 기도로 많은 시간을 보냈고, 사람들의 냉대마저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말년에 로마에서 낮에는 성당에서 기도와 성체조배를 바치고, 밤에는 콜로세움에서 새우잠을 자며 지내던 성인은 성주간 수요일에 성당에서 성체를 조배한 뒤 어느 푸주한의 집에서 선종했다.
무소유를 실천한 순례자요 ‘새로운 프란치스코’인 성인의 삶은 세상에서 잊히거나 묻혀버리지 않았다. 사람들은 성인을 일컬어 ‘그리스도를 위하여 바보’가 된 그리스의 살로이와 러시아의 유로디비에 견줄 만한 높고 훌륭한 성덕을 쌓은 이라고 평가했다. 40시간 성체조배 신심의 전파자이기도 한 성인은 노숙인의 수호성인으로서 공경을 받는다.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의 수호성인, 성 로코(축일 8월 16일)
성 로코는 14세기에 프랑스 남부의 지중해 연안에서 태어났다. 자녀가 없던 부모의 간절한 기도 끝에 태어난 성인은 신심 깊은 부모 슬하에서 자랐으나 스무 살 무렵에 부모를 잇달아 여의었다. 지방20240313112248_381867211.jpg 장관을 지낸 아버지의 뒤를 이을 수도 있었지만, 성인은 이를 포기하고 막대한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준 다음 로마로 순례를 떠났다. 마침 이탈리아에서는 흑사병이 창궐했고, 성인은 지나는 곳마다 헌신적으로 환자들을 보살피며 로마에 도착했다. 로마에서도 또한 병원을 찾아가 전쟁과 전염병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돌보았다. 성인이 십자성호를 긋고 기도한 다음 아픈 부위에 손을 대면 상처가 낫고 병이 치유되는 기적이 일어났다.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많은 사람이 소문을 듣고 성인에게 몰려들었고, 성인을 그들을 물리치지 않았다. 그러던 중에 성인 자신이 흑사병에 걸렸는데, 도움을 받던 마을 사람들은 매몰차게 성인을 쫓아냈다. 인적이 드문 숲으로 피해 가서 목숨을 연명하던 성인은 어렵사리 병이 나은 뒤에 다시 자신을 쫓아낸 마을로 돌아가서 앓는 이들을 보살폈다.
그 뒤 성인은 힘들게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병으로 생긴 상처와 남루한 행색을 본 고향 사람들은 그가 전임 장관의 아들임을 알아채지 못했다. 오히려 당시 전쟁 중이던 이웃 나라에서 순례자로 변장시켜 보낸 간첩이라는 누명을 씌워 5년 동안 감옥에 가두었다. 끝내 자기 신분을 밝히지 않고 수감생활을 하던 성인은 끝내 감옥에서 숨을 거두었다. 시신을 수습하던 사람들은 그제야 비로소 성인을 알아보았다.
성인은 무엇보다도 치유의 은사를 베푸는 사람으로 유명했고, 특히 흑사병이나 다른 몹쓸 병으로 고통받는 이들의 수호성인으로서 큰 공경을 받아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