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광역시 중구 항동1가(인천 중부 경찰서 담장 쪽)에 샬트르 성 바오로회 수녀님들의 우리나라 첫 선교 도착지 표지석이 있다. 이 표지석은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한국 설립 120주년을 맞이하여 2007년 7월 22일 세웠다고 한다.
표지석은 조각가 최종태 요셉 교수가 선교수녀들이 배에서 내리는 장면을 표현한 청동 부조와 제1대 원장 자카리아 수녀의 여행 일기에 적혀있던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라는 기도문이 새겨져 있다.
1886년 조선과 프랑스가 정식으로 수교를 맺어 조선에서도 100여 년 동안의 천주교 박해가 끝나고 자유로이 신앙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따라,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7대 교구장인 파리 외방전교회 블랑 백 요한 주교는 1887년 7월 프랑스의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 “조선에 수녀들을 파견해 달라.”라고 요청했다.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서는 이 요청을 받아들여 4명의 수녀를 조선에 보냈다.
1888년 7월 22일 새벽 5시, 프랑스인 자카리아 수녀와 에스텔 수녀, 중국인 수련수녀 비르지니 수녀와 프란치스카 수녀가 인천 제물포항에 상륙했다. 이 입국지가 바로 인천 중부 경찰서 담장 쪽이다.
이때 도착한 네 분의 수녀님들에 의하여, 조선인 소녀 5명이 수녀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기 시작했는데, 모두 독실한 천주교 신자 집안의 딸들이었다. 3명은 병으로 일찍 죽었으나 김해겸 마리아와 박황월 글라라는 무사히 수련을 마치고 최초의 한국인 수녀가 되었다.
박황월 글라라 수녀는 박해 시기 천주교 순교 역사의 증거자이자 인천지역 천주교 선교에 큰 역할을 했던 박순집 베드로의 셋째 딸이며, 인천교구 제3대 교구장 정신철 요한 세례자 주교의 외가 쪽 조상이기도 하다.
이후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는 서울뿐 아니라 여러 지방에도 진출했고, 1915년에는 대구에도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원이 세워졌다. 대구 수녀원과 성당은 훗날 문화재로도 지정되었다.
1967년에는 서울관구와 대구관구로 분리되었으며, 오늘날 한국의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는 2개의 관구에서 1000여 명의 수녀들이 본당 활동은 물론, 선교, 사회복지, 교육, 의료 등 각 분야에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블랑 주교는 샬트르 성 바오로회에 조선에 수녀 파견을 요청
샬트르 성 바오로 수도회는 1696년 프랑스 러베빌(Levesville)에서 루이 쇼베(Louis Chauvet) 신부에 의해 창설된 가톨릭 수도회이며, 우리나라 가톨릭 최초의 수도회이자 제일 큰 수도회이기도 하다. 수도회의 사명은 애덕이고, 정신은 단순, 겸손, 대담성이며, 영성은 그리스도 중심의 영성과 파스카의 영성이다.
창설자 루이 쇼베 신부는 작은 시골 마을의 평범한 본당신부였다. 그는 러베빌 마을에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 방치되고 있는 아이들, 기타 보살핌을 필요로 하는 불쌍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고, 이들을 도울 방법을 궁리한다. 이 일을 위하여 그는 마을에서 신앙심 깊은 처녀 4명을 뽑아 공동체를 만들었다. 그녀들은 가난한 사람들과 환자들을 방문하여 보살피고, 아이들을 가르치고 돌보았다.
4명만으로 시작한 공동체는 점점 더 성장했고, 쇼베 신부는 이 공동체를 샬트르(샤르트르) 교구에 위탁했다. 샬트르 교구장 주교는 공동체에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라는 이름을 주고, 사도 바오로를 주보성인으로 정했다.
기자는 이 근처에서 30여 년간을 근무하며 지나쳤는데도 표지석은 얼핏 보았지만 이런 깊은 뜻이 있는 줄 전혀 몰랐다. 그런데 2021년 3월, 인천교구 설정 60주년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탄생 200주년 기념행사로 도보순례 9개 길 중 ‘1코스 온유의 길’을 순례하고 나서야 이곳이 샬트르 성 바오로회 수녀님들의 첫 선교 도착지 임을 알았다.
그래서 2022년 9월에는 우리 쁘레시디움 야외행사에서 단원들과 함께 제물포 진두 성지를 돌아보고, 바로 건너편에 있는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수녀님들의 첫 선교 도착지를 찾아 그분들의 숭고한 신앙을 묵상하며 기도하였다.
다시 한번 이분들의 숭고한 신앙 개척 정신에 감사드리며, 그동안 등한시했던 선교수녀 도착지를 자주 찾아뵈어야겠다고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