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훈화
사순 제3주간-
주님 부활 대축일
윤진우 세례자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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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우 세례자 요한 신부는 대전교구 소속으로 2014년에 서품을 받고, 로마 안셀모 대학교에서 전례를 전공했다.대전 노은동성당 보좌, 대전 주교좌 대흥동성당 제1보좌를 역임했고, 지금은 대전교구 사목국 부국장과 교구 전례꽃꽂이 지도 사제로 소임을 맡고 있다. 현재 대전가톨릭대학교에서 신학생들에게 전례를 강의하고 있고, 대전교구 주보에 “가톨릭 신자라면 알아야 하는 미사”를 연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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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3주간(3월 3–9일) 
사순시기의 영성적 준비

사순시기가 시작되고, 어느덧 세 번째 주간을 걷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사순시기를 시작하며 ‘술을 끊겠다’, ‘커피를 끊겠다’ 등의 개인적인 다짐들을 하며 이 시기를 보내곤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다짐들은 종종 그 목적이 ‘나를 위한’ 실천으로 정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순시기의 거룩한 다짐은 나를 위함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에 동참하고, 나아가 그리스도의 영광에 함께 하기 위함이라는 목적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교회는 사순시기를 “우리의 육체적 고신 극기나 단식을 통한 참회의 생활로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에 참여하여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도록 준비하시는 시기”라고 설명합니다. 이러한 준비는 온전히 ‘나를 위한’ 시간이 아닌 ‘주님을 위한’ 시간으로 준비해야만 합니다. 실제로 이 시기에 교회는 전통에 따라 2가지의 영성적 준비로 초대합니다. 첫 번째는 ‘단식’이고, 두 번째는 ‘전례’입니다. 
첫 번째인 ‘단식’은 교회법규에 의한 것이 아닌 자발적으로 실천하던 것이 교회법에 도입된 것입니다. 과거에 비해 단식 규정이 많이 완화되긴 했지만, 주님의 수난에 동참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단식은 사순시기를 잘 보내기 위한 영성적 준비이기도 합니다. 
두 번째로 ‘전례’는 참회와 속죄를 주제로 성사에 참여하도록 인도합니다. 희생 제사로 봉헌되는 미사에서 우리는 매 순간 주님의 수난과 부활의 영광을 체험하곤 합니다. 사순시기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맞이하기 위한 준비의 시간이지만, 이 준비는 단순히 기다림의 차원을 넘어서 주님의 수난에 동참함으로써 완성된다는 점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순시기 동안 미사는 다른 때와 달리 더욱더 강조되곤 합니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위한 준비를 하고 있습니까? 나를 위한 준비입니까? 아니면 주님의 영광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입니까? 우리의 올바른 영성적 준비로 이 시기를 은혜로운 때로 맞이하고, 주님과 하나 되기 위해 걷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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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4주간(3월 10–16일) 
우리에게 ‘참회’란? 

사순시기에 가장 많이 반복되고, 강조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참회’입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있는 참회의 뜻은 “과거의 그릇된 죄를 기억하고 현재의 죄의 상태를 인식하며, 죄를 지었음을 슬퍼하고, 죄가 용서되기를 바라고, 죄를 짓지 않겠다는 의지적 요소”라고 설명합니다. 곧, 나의 부족한 부분들을 올바로 깨닫고, 그 죄를 진심으로 통회하며, 주님께 용서받기를 바란다는 점이 참회의 의미입니다. 다소 교리적인 내용이라 어렵게 받아들이실 수 있지만, 참회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요소는 “나의 부족함을 바라보다.”, “나의 죄에 대해 통회하고 용서를 구하다.”, “주님을 향한 발걸음을 시작하다.”의 세 가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미사 중 영성체를 모시기 전 사제는 ‘영성체 전 기도’를 바칩니다. 그 기도의 말미에는 이러한 표현이 적혀있습니다. “이 지극히 거룩한 몸과 피로 모든 죄와 온갖 악에서 저를 구하소서. 그리고 언제나 계명을 지키며 주님을 결코 떠나지 말게 하소서.” 저의 개인적인 체험을 간단히 나누자면, 어느 미사에서 이 기도를 속으로 바치는데, “주님을 결코 떠나지 말게 하소서”라는 구절에서 울컥했던 적이 있습니다. 나 자신이 얼마나 잘 살았느냐, 그리고 주님 보시기에 합당하게 살고 있는가를 성찰하던 중이어서 그런지 더욱 공감되는 구절이었습니다. 
참회가 담고 있는 뜻과 나아가 “주님을 결코 떠나지 말게 하소서”라는 기도 구절이 주는 의미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참회의 모습을 묵상해야 합니다. 우리의 부족함을 영적 거울에 비춰 보고, 그리고 그 부족함에 고개를 떨구기보다는 주님께로 나아가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일러주신 그 사랑의 길로 나아갈 것을 다짐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주님을 결코 떠나지 않는 거룩하고 합당한 삶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참회의 삶은 나를 아는 것이며, 주님께로 향한다는 단순한 진리를 기억하며 행하도록 합시다. 이것이 참회가 가지고 있는 단순한 진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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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5주간(3월 17–23일) 
“하느님, 제 마음을 깨끗이 만드소서.”

죄에 자주 걸려 넘어집니다. 반복되는 죄가 마치 끊을 수 없는 족쇄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죄책감에 나의 마음이 먹먹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더욱 나의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 것은 죄책감에 무거운 마음을 지니면서도 다시 시작하는 것에 부담을 갖는다는 데 있습니다. 
잘못된 삶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걸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분명 내 삶이 주님을 향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느끼고, 나의 부족함을 알고 있음에도 현실적인 이유에 가로막혀 이를 단호히 끊어내지 못하고 주저하게 됩니다. 물론 단호히 끊어내지 못한다고 해서 거룩한 삶에 대한 의지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분명 깨끗해지고, 분명 더 거룩해지길 원하며, 분명 주님 보시기에 합당한 모습으로 살기를 원하는 의지가 분명히 있음에도, 그러지 못하는 자신을 바라보며 또다시 마음이 무너지기도 합니다. 
이러한 나 자신을 바라보며 우리는 어떠한 말씀을 기억해야 할까요? 그리고 사순시기를 지혜롭게 보내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요? 그리고 사순시기를 잘 보내고, 내가 지닌 죄의 어둠을 털어버리기 위한 거룩한 방법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하느님, 제 마음을 깨끗이 만드소서.”를 되뇌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깨끗해지기 위해서는 나의 의지와 노력으로 완성됨이 아니라, 주님께 의탁함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내가 기도를 해서 완전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주님께 의탁하며 봉헌하는 기도를 통해 주님께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생활이요, 신앙생활의 핵심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주님께 더욱 간절히 의탁하고 청하고 말씀을 중심에 두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죄로 인해 우리는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분은 오직 주님임을 기억하며 이 말씀을 믿음으로 기억했으면 합니다. “하느님, 제 마음을 깨끗이 만드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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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수난 성지 주일, 성주간(3월 24–30일) 
주님을 따라 걷는 ‘십자가의 길’ 

“어머니께 청하오니, 제 맘속에 주님 상처 깊이 새겨 주소서.”(십자가의 길 기도 중) 
사순시기 매주 금요일에 우리는 십자가의 길을 봉헌합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그날, 십자가를 짊어지고 걸으셨던 그날, 우리 역시 주님과 함께 그 길을 걷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기 위해 ‘주님의 날’ 곧 주일에 미사를 봉헌하며 부활의 신비에 함께 참여하는 것처럼, 금요일에는 주님께서 걸으셨던 고통과 죽음의 길을 묵상하며 함께 그 길에 참여하게 됩니다.
실제로 ‘십자가의 길’의 의미를 찾아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시간(수난과 죽음)을 기억하며 구원의 신비를 묵상하는 기도”라고 적혀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길은 가장 힘든 시간을 보내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동행한다는 의미를 되새기며 따라나서야 합니다. 예루살렘 입성 당시 수많은 군중은 메시아가 오셨다며 올리브 나뭇가지를 들고 환호합니다. 저분이 악의 세력을 물리치고, 지금의 어려움에서 우리를 해방해 주실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온전히 맞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분명 우리를 해방의 길로 인도하시지만, 악의 세력을 물리치는 방법이 달랐습니다. 악의 세력을 힘으로 굴복시키는 것이 아닌 스스로가 낮아지시고, 고통과 죽음이라는 문턱을 넘어 우리의 한계점에 친히 함께하시는 모습으로 나아가셨습니다. 환호했던 군중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메시아라고 생각했던 그분을 이제는 사형당하기에 마땅한 사람으로 취급해 버립니다. 그리고 그 길 위에서 벌어진 수많은 일들은 지금 우리를 14처 십자가의 길 기도로 이끕니다.
내가 가장 힘든 순간에 누군가의 위로는 우리를 일으켜 줍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힘이 있으니, 그 어려움을 함께 마주하며 함께 걸어갈 때 우리는 그 안에서 사랑을 느끼곤 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의무감으로 바치는 것이 아닌 주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으로 십자가의 길을 걷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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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부활 대축일, 부활 팔일 축제(3월 31일–4월 6일) 
“이날은 주님이 마련하신 날, 
이날을 기뻐하며 즐거워하세.”

제목의 시편 구절처럼 우리는 이 주님 부활 대축일과 부활 팔일 축제, 나아가 이 부활 시기를 기쁨으로 맞이하고 즐거워하며, 많은 분과 축하 인사를 나눴으면 합니다. “주님의 부활을 축하드립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을 축하하는 것일까요? 주님의 부활과 서로가 서로에게 나누는 축하 인사말이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주님의 부활을 축하하는 신앙인들은 같은 믿음과 희망, 사랑의 사건으로 주님에게만 벌어진 일이 아닌 우리에게 벌어질 신비로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 역시 부활을 굳게 믿고, 희망을 간직하자는 차원에서 우리에게는 축하의 메시지가 되는 것입니다. 동시에 부활을 통해 이제 우리는 영원한 죽음이 아닌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갈 수 있고, 악으로부터 온전히 해방된 것을 축하하는 것입니다. 또한 사순시기 동안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기도와 단식, 자선의 실천으로 악습을 끊어내고 이제는 새로운 생활을 통해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에 대한 축하의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의미들은 주님 부활을 통해 우리가 얻은 ‘은총’에 대한 감사와 은총을 받은 것을 축하하며 더욱 풍성히 나누자는 의미에서 부활 인사는 우리에게 또 다른 신앙고백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사순시기 동안 우리의 부족함이 결코 부활의 기쁨을 앗아갈 순 없습니다. 준비를 잘했든, 잘하지 못했든 우리는 주님의 부활을 체험한 그리스도인들이고, 그 부활 신앙을 믿고 살아가는 이들입니다. 이제는 어제의 부족함에 머물러 지금 나에게 주어진 은총의 빛을 놓치지 말고, 그저 그 빛에 머무르고, 그 빛으로 희망을 심는 것이 중요합니다. 더 많은 이들과 축하의 인사를 나눔으로써 부활을 당당히 선포하고, 이 기쁨이 세상을 향해 희망을 던져주는 ‘복음’이 되었으면 합니다. 우리 모두 부활을 진심으로 기뻐하며 즐거워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