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의 샘2
양심 성찰과
부활의 기쁨
박용욱 미카엘 신부 대구대교구 사목연구소 소장

마음을 금지하라!
1982년 김현준, 민해경 듀엣이 부른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는 노래가 있었습니다. 나오자마자 학생들의 열화 같은 지지를 받아 가요 프로그램에서 4주 연속 1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습니다. 부모 뜻대로만 인생을 살 수는 없다는 가사가 젊은 세대의 공감을 얻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이 노래가 돌연 방송과 음반시장에서 사라져 버립니다. 아이들에게 반항심을 불러일으킨다는 학부모들의 항의가 빗발치자 정부 당국이 금지곡으로 묶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헛웃음 나올 일입니다. 사람의 생각과 마음을 법과 제도로 묶어 놓을 수 있을까요? 노래 한 곡 못 듣게 한다고 고삐 풀린 망아지가 얌전한 모범생이 될 리 없을뿐더러, 국가가 국민들을 불신하며 마음속까지 통제하겠다는 태도는 영 마뜩잖습니다. 자녀들에게 좋은 것만 보고 듣게 하려는 마음이 지나친 나머지, 사사건건 간섭하며 이것저것 ‘잡아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부모님들이 적지 않지요. ‘헬리콥터 부모’ 같은 신조어는 세계적으로도 널리 퍼져 있습니다. 

인간을 믿으시는 하느님 
모든 인간의 아버지이신 하느님은 인간을 당신 모습대로(창세 1,26-27) 창조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외양을 닮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부모를 닮은 자녀라면 무릇 생김새뿐만 아니라 성격, 기질, 습관 같은 것들도 닮습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하느님을 닮았다고 하는 것은 인간이 하느님의 품격과 존엄성, 관심과 생각을 닮았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을 꼭두각시로 만든 것이 아니라, 당신을 닮아 존엄하고 자유로운 존재로 창조하셨다는 것이지요. 
하느님께서 주신 이 존엄과 자유는 에덴동산 이야기에서 더 분명해집니다. “너는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어도 된다.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는 따 먹으면 안 된다. 그 열매를 따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창세 2,16-17)
여기서 하느님 말씀의 방점은 단연코 모든 나무에서 따 먹어도 된다는 허락에 찍혀 있습니다. 최소한의 선만 지키되, 마음껏 자유를 누리며 살라는 신뢰와 사랑의 말씀이지요. 이 말씀이 통제와 금지의 말씀이었다면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에덴동산을 일구고 돌보는 일을 맡겨 주시거나(창세 2,15), 협력자를 만들어 주실 리 없었을 것입니다. 
심지어 하느님은 인간이 손대지 말아야 할 선악과나무를 에덴동산에 그냥 두셨습니다. 인간에게 자유를 주면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른다고 불신하셨다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 너희들이 잘못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너희를 못 믿을 존재로 여기지 않겠다. 너희들이 내 말을 거역할 수도 있겠지만, 그 과정을 거치면서 마음 깊이 깨달을 수 있을 거야’하는 신뢰가 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는 아담과 하와가 열매를 따 먹고 난 후에 하느님께서 곧장 추방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기회를 주시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느님은 죄를 짓고 숨은 두 사람에게 다가가서 먼저 말씀을 건네십니다. 자녀가 사고를 저질렀을 때 근심 어린 모습으로 어쩌다 그랬느냐고 묻는 자상한 부모님의 모습이지요.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용서하러 다가오시는 하느님을 거절하고 서로를, 또 피조물을 탓하다가 낙원에서 추방당합니다. 하느님은 사람의 가능성을 믿고 다가오시는데, 사람은 스스로의 가능성을 믿지 않고 도망가는 형국입니다.

고해성사는 화해와 치유의 성사  
올해 3월은 회개와 보속의 사순시기와 부활의 기쁨이 이어지는 달입니다. 주님 수난과 부활의 파스카 성삼일로 절정에 달하는 신비를 더 잘 묵상하도록 교회는 판공성사를 받게 합니다. 문제는 이 성사가 부담스러워서 신앙을 멀리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입니다. 용서하시는 하느님이 다가오실 때, 자기 죄의식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끝내 화해의 기회를 차 던져 버리는 아담과 하와처럼 말이지요.
고해성사를 피하게 되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제 사목 경험을 돌이켜 보면 양심 성찰에서부터 걸려 넘어지는 분들이 꽤 많았습니다. 성찰을 하자면 많은 분들이 먼저 자신의 죄와 잘못부터 살핍니다. 하지만 이런 식의 성찰은 하느님의 용서와 자비에 마음을 열기보다 자신에게 묻은 티끌과 흠 하나도 용납하지 못하는 강박관념과 세심증에 빠지게 할 수 있습니다. 반복적으로 성사를 봐도 별로 달라지지 않는 모습에 자기혐오를 느끼기도 합니다. 이 모두가 용서하시는 하느님, 잘못을 저질렀어도 다시 일어나서 존엄과 자유를 누리기를 원하시는 하느님께 등을 돌리는 일입니다. 
그런 점에서 양심 성찰의 첫 단계는 하느님께 받은 은총에 감사할 거리를 찾아보는 것이어야 한다고 봅니다. 부족한 면이 있어도 또다시 일어설 기회를 주시는 하느님, 나를 알게 모르게 도와주었던 많은 형제자매들, 내 삶을 지탱해 주는 모든 생명들에 대한 감사, 그렇게 감사할 거리를 발견할 수 있다면 잘못을 성찰하는 일은 저절로 이뤄집니다. ‘나는 하느님의 자비를 잊고 혼자 사는 세상인 것처럼 착각했구나.’, ‘내 옆에 있어 준 형제자매들에게 충분히 감사하지 못하고 내가 채권자나 된 듯 행세했구나.’ 같은 깨달음이 따릅니다. 고백과 보속은 그런 깨달음을 행동으로 옮기는 일이겠지요. 

고해의 기쁨, 부활의 기쁨  
고해성사는 묻어두었던 죄책감을 꺼내 고백함으로써 심리적 후련함을 느끼라는 것이 아닙니다. 세금 정산하듯이 한 번씩 털어 보는 일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를 존엄하고 자유롭게 낳으신 하느님 아버지와 만나는 일이고, 우리가 넘어지는 한이 있어도 툭툭 털고 일어나서 기쁘게 길을 가도록 바라보시는 자비로운 아버지를 체험하는 일입니다. 
일생을 병고에 시달리면서도 그리스도교 정신이 충만한 작품으로 많은 이들을 감동시켰던 미우라 아야코 작가는 “지금껏 절망하지 않고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그래도 내일은 온다’라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어떤 내일일지는 몰라도 어쨌든 하느님이 나에게 주신 하루다.”라고 말합니다. 고해성사를 통해 이렇게 우리에게 희망을 주시는 하느님, 우리를 믿어주시는 하느님께 기쁘게 나아갈 수 있다면, 부활을 통해 선사 받는 새 생명의 기쁨도 더 벅차게 와 닿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