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모님 발현과 레지오
체코 필리포프(1866년)
최하경 대건안드레아 서울대교구 도곡동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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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대적 배경 
필리포프는 체코의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 지역의 옛 명칭은 보헤미아이며, 이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보헤미안이라 부른다. 보헤미안은 사회의 관습에 구애되지 않는 자유분방한 생활을 하는 f1290b03090e49d6f91cad17691f8ce3_1708907305_6741.jpg예술가, 지식인, 문학가를 지칭하는 단어이지만 이건 최근의 일이고 이전에는 유랑 생활을 하는 집시를 비하하여 부르는 말이었다. 보헤미안이 유랑 생활을 하게 된 이유를 강대국들 사이에 위치하는 지정학적인 원인에서 찾을 수가 있다.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보오 전쟁)이 일어나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를 침략하였는데 이 두 나라의 주된 전투가 일어난 곳이 바로 보헤미아 지역이었다. 보오 전쟁의 마지막 전투에 약 45만 명의 군인이 투입되어 5만 명 가까이 되는 전사자가 발생하였다. 대규모 전투로 보헤미아는 쑥대밭이 되었고 엄청난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전쟁이 일어날 때마다 보헤미안들은 고향을 떠나 유랑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으며, 그곳에서 버티고 산다 해도 피곤하고 고단한 생활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이렇게 항상 불안하고 열악한 환경에 놓여있던 보헤미아 필리포프에서 성모님이 발현하셨다. 

2) 성모님의 발현
1866년 1월 13일 필리포프 63호 집에서 부모를 여의고 각종 질병으로 침상에 몸져누웠던 31세의 막달레나 카데오바에게 성모님이 발현하셨다. 그녀는 폐렴과 흉막염, 그리고 수막염 등으로 고생하고 있었는데 1865년 2월에 또 다른 심각한 가슴 통증이 나타났고 그녀의 오빠 요세프의 가족과 두 명의 주치의가 그녀를 돌보았다. 1865년 11월 주치의는 막달레나가 더 이상 치료가 불가능하며 곧 죽을 것이라고 진단하였다. 그녀는 고통이 점점 심해졌으며, 더 이상 움직이지도 못했고 자주 의식을 잃었다. 1865년 12월 21일 스토르흐 신부는 그녀에게 종부성사를 하였으며 가족과 주변 사람들은 모두 이제 죽음만이 그녀를 고통으로부터 해방시켜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3주 후 1866년 1월 12일 밤에 옆집에서 살고 있던 그녀의 오래된 친구인 베로니카 킨더만이 찾아와 그녀의 머리카락을 빗겨 주었으며 같이 기도한 후 잠자리에 들었다. 새벽 4시경 막달레나는 고통이 심해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어서 기도를 하였는데 갑자기 밝은 빛이 비치면서 방이 낮보다 더 환해졌다. 그녀는 깜짝 놀라서 팔꿈치로 베로니카를 깨우며 “저 아름다운 빛을 봐요”라고 말했다. 그러나 잠에서 깬 베로니카에게는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그때 막달레나는 그녀의 침대 앞에서 흰옷을 입고 머리에 황금색 왕관을 쓴 빛나는 여인을 볼 수 있었다. 막달레나는 그 순간 이 여인이 ‘하느님의 모후’라는 생각이 들자 몸을 떨면서도 두 손을 모아 “저의 영혼은 주님의 영광으로 빛나고, 저의 정신은 저의 구원자이신 하느님 안에서 기뻐합니다.”라고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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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여인은 일반 사람들이 말하는 것과는 다른 특이한 음성으로 부드럽게 “내 아이, 이제부터 너의 병이 나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여인은 서서히 사라졌으며 막달레나는 즉시 치유되었다. 그날 새벽 막달레나는 혼자의 힘으로 침대에서 일어나서 움직일 수 있었으며 다시 일을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무한한 행복감에 젖었다. 아침이 되자 그녀는 빵을 사러 동네 빵집에 갔고, 마을 주민들은 그녀가 건강한 상태로 거리를 돌아다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었다. 막달레나는 “밤에 성모님이 저를 보고 이제부터 회복할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저는 그 순간부터 건강해졌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했다. 이 소식은 즉시 주변 지역에 퍼졌고 막달레나의 집으로 찾아온 사람들은 직접 그녀를 보고 싶어 했으며 일부는 집안까지 밀고 들어왔다. 그녀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수도 없이 반복하며 자세하게 설명하였다. 성모님의 발현과 기적의 치유 이야기가 널리 퍼지자 그녀의 집으로 순례 오는 사람들이 계속 늘어났다.

3) 성모님의 발현 이후
1870년 스토르흐 신부는 막달레나의 집을 매입하여 경당으로 사용하였다. 이리코프 교구는 순례자들을 위하여 1873년 1월에 막달레나의 집터에 대성당 공사를 착수하였고, 1885년 정면에 2개의 탑이 있는 신 로마네스크 양식의 대성당을 봉헌하였다. 그리고 대성당을 관리 유지하고, 순례자들을 안내할 목적으로 1884년 대성당 바로 옆에 수도원을 건립하였다. 대성당 정면의 출입구 좌측에는 막달레나의 구술에 따라 높이 86cm의 발현하신 성모님 성상이 만들어 세워져 있는데 이곳이 바로 치유의 기적이 일어난 침대가 있었던 위치이다.
막달레나는 그녀의 집으로 방문하는 수많은 순례자와 아픈 사람들을 정성껏 돌보았으며 대성당 건립을 위한 자금을 지원하기 위해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전부 매각하여 기부하였다. 그리고 이리코프의 양로원으로 가서 오랫동안 봉사활동에 전념하다가 1905년 12월 10일 70세 나이로 선종하였다. 
1867년 1월 이리코프에서 살고 있었던 한 여자는 11년 동안 걷지 못하는 장애자였는데 그녀를 막달레나가 누워있었던 침대에 눕히자마자 다리가 회복되어 걷게 되었다. 이 기적 이후 막달레나의 집으로 찾아오는 순례자가 급증했으며 결국 주교는 조사위원회를 구성해서 막달레나와 두 주치의의 증언 등 사건을 면밀히 조사했으며,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성모님 발현의 초자연적인 성격과 기적의 치유를 공인하였다. 
1926년 1월 13일 교황 비오 11세는 성모님 발현 60주년을 기념하며 성당을 대성당으로 격상하였고, 그해 9월 12일 교황은 성모님께 왕관을 봉헌하였으며 대관식은 주교에 의해 진행되었다. 1930년경에는 매년 10만 명이 넘는 순례자가 방문하여 중부 유럽에서 제일 유명한 성모님 발현 성지가 되어 ‘보헤미아의 루르드’로 불렸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토지의 소유권이 체코로 넘어가면서 예상하지 못한 비극이 일어났다. 체코는 1945년부터 1950년까지 독일 국적을 갖고 있던 시민들을 필리포프에서 추방하였으며 아무런 연고도 없는 체코인을 이주시켰다. 더욱이 공산당이 집권하자 가톨릭에 대한 종교 탄압까지 생겨났으며 이런 와중에 성모님의 왕관이 아무도 모르게 사라졌다. 1970년까지 필리포프는 잊힌 순례지가 되었으며, 대성당은 유지 관리할 비용조차 없어 방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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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프라하의 봄 혁명 후부터 필리포프 성지는 원래의 상태로 조금씩 회복하게 되었다. 1980년 독일의 가톨릭 신자들은 새로운 황금 왕관을 마련하였고, 1985년 4월 10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바티칸에서 이 새로운 왕관을 축성하였다. 1985년 6월 16일 추기경과 대주교가 참석한 가운데 대성당에서 성모상에 대한 대관식이 거행되었다. 새로운 왕관을 쓰고 계시는 성모상은 대성당 입구에 위치한 성모 마리아 경당에서 만날 수 있다.  

<사진 설명(위로부터)>
_ 막달레나의 침대가 있었던 위치에 세워진 필리포프의 성모님 성상(좌) 성모님 발현을 기념하여 봉헌된 그리스도인들의 도움이신 성모 마리아 대성당(우)
_ 그리스도인들의 도움이신 성모 마리아 대성당의 내부 전경
_ 막달레나에게 발현한 성모님(좌)
  막달레나가 누워있었던 침대, 현재 대성당 제단의 왼쪽 방에 보관되어 있다.(우)
_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축성을 받는 황금 왕관(좌)
  교황이 축성한 황금 왕관을 쓰고 있는 성모님 성상이 모셔져 있는 성모 마리아 경당(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