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 공소에서 어린 시절 복사를 할 때 성당은 비포장 시골길을 한 시간 정도 걸어가야 했습니다. 추운 겨울, 새벽길을 걸어 성당에 도착하면 가끔 성당 문이 열리지 않아 발을 동동 구르며 기다릴 때, 성당 문 철창 틈 사이로 성모님을 보면 마음이 따뜻해지곤 하였습니다. 곧 미사가 시작되고 새벽빛이 가실 때쯤이면 추위도 스르르 녹고, 가슴 가득 희고 푸르름이 채워짐을 느끼곤 하였습니다.
하느님이 누구이고 어떤 분이며, 또 나에게, 우리에게 어떤 분이라고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도 없고, 이해하지도 못했던 때이지만, 어둡고 추운 시골길을 걸을 때도, 찬 바람 부는 성당 문 앞에 서 있을 때도, 새벽녘에 가만히 제대와 십자가를 바라볼 때도 굳이 묻고 따지지 않아도 내 마음 안에 따스함으로 머물고, 함께해 주시는 분이 계심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신학생이 되어 하느님을 공부하고, 사제가 되어 하느님에 관하여 가르치고 있는 지금도 과연 난 얼마나 하느님을 느끼고 있을까 하는 질문을 종종 던지게 됩니다. 어릴 적보다 더 지적으로 성장했다고 자만하며 살고 있는듯한 오늘, 신학교에서 삼위일체론을 가르치고, 사제로서 여러 직무를 수행하고, 교우를 돕고 그들과 어우러지는 속에서 과연 나는 하느님을 얼마나 알고 가까이 느끼는가 질문을 던져봅니다.
부활의 희망 속에서 인류의 구원을 이루시는 주님의 수난을 묵상하는 사순시기를 보내며 강론과 훈화를 통해 전달하는 그 하느님이 진정 “영원히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느님”인지, 내가 말하고 있는 하느님이 진정 살아계신 하느님인지 생각해 봅니다. 또한 자기 비움과 온전한 내어줌으로 진정 나의 형제가 되어 주시는 하느님을 나의 삶 안에서 만나고 있는지 자문해 보게 됩니다. 놀거리와 볼거리가 즐비한 오늘날 세상살이에서 바람처럼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만나고 느끼기는 더욱 힘들어 보입니다. 그럼에도 나는 하느님에 관해 나름 잘 알고 있다는 생각은 어디에서 올까요. 혹은 하느님은 너무 멀리 계셔 알 수 없다는 생각은 과연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하느님을 다 알 수는 없어도 하느님은 이미 우리 안에 살고 계셔
사순시기를 절제와 극기로 보내며 나를 정비하고 이 시기를 깨어 살아보려고 애쓰는 이유는 그분을 알고, 그분을 만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느님의 모습을 제대로 알고 있을까요? 우리는 각자 자기가 원하는 자기만의 하느님 상을 지닌 채, 그 모습만을 고집하며, 혹시 나의 삶과 형제의 삶 안에서 하느님의 자리를 작게 만들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우리 안에 당신의 자리를 만들기 위하여 세상에 오시고, 우리와 함께 살기 위하여 골고타로 나가시는 그 주님을 나의 지식과 경험으로 ‘대상화’하거나 ‘지식화’한다면, 살아계신 주님의 자리는 점점 더 작아져 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신명기 30장 11-14절의 소제목은 “말씀은 가까이 있다”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저 멀리 하늘에 있는 것도 아니고 바다 건너편에 있는 것도 아닌 우리에게 아주 가까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입과 너희의 마음에 있기 때문에, 너희가 그 말씀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신명 30,14) 마치 우리가 가까이 있는 소중한 사람을 늘 있는 사람이라 착각하며 그 사람과 함께 살아있음을 망각하는 것처럼, 하느님은 멀리 계신 분도 아니고,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분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느님은 말이나 글로 나열하거나 정의 내리거나 확정 지을 수 있는 분이 아니라 “실천할 수 있는 분” 곧, 우리 안에 우리와 더불어 아주 가까이 항상 함께 살아계신 분이라 말씀해주는 것입니다.
그분을 이해하기 어렵거나 혹은 멀리 계시다고 생각하는 이유, 혹은 그분을 많이 알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는 이유는, 하느님을 내가 알아가야 하는 분으로 대상화하거나 인간의 말로 정의 내리려 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아주 가까이 우리에게 계시며, 마치 우리 몸의 피와 심장같이 우리 안에 살아 움직이는 분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앎과 하느님의 상을 특정 지식 안에 가두거나 나만의 틀 안에 고정하는 것은 나만의 우상을 만드는 일입니다. 또한 하느님을 그냥 멀리 계신 대상으로만 여기는 것 또한 예수님의 삶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참모습이 아닙니다.
비록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입니다. 내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때에는 하느님께서 나를 온전히 아시듯 나도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1코린 13,12) 분명 지금은 우리가 하느님을 다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복음이 우리에게 밝혀주듯, 하느님은 이미 우리 안에 들어와 살고 계십니다. 온전히 그분을 알게 되는 그때까지 지속될 믿음과 희망과 사랑 안에서 우리의 삶 안에 아주 가까이 살아계시는 하느님을 십자가의 신비를 통해 느끼는 사순시기가 성령의 도우심 안에서 이어지길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셨듯 우리의 보호자 성령께서 그리되도록 도우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