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기를 시작하며
성경 안에서 룻기는 그리스말 번역본인 70인역과 라틴말 번역본인 불가타의 경우 판관기 다음에 배치되어 있는데, 그것은 룻기가 “판관들이 다스리던 시대에”라는 말로 시작하는 까닭입니다. “물이 넉넉히 차다”라는 동사에서 나온 이름으로 유추되는 ‘룻’이라는 여주인공의 이름에서 유래하는 ‘룻기’는 총 4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유다 땅에 기근이 들어 모압지방으로 이주해 갔다가 베들레헴으로 돌아온 두 여인(시어머니와 며느리)과 친척 ‘보아즈’로 구성된 한 가정의 역사를 서술하고 있습니다.
룻기는 그 서술 문체와 법적 관습이 오래되었다는 점에서 기원전 587년에 일어난 (유다 왕국의 멸망과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에 이은) 바빌론 유배 이전에 씌어졌다는 주장도 있지만, 판관 시대를 먼 옛날로 서술하는 점, 언어상의 특징, 보편주의와 보상에 관한 개념과 고통의 의미와 같은 신학적인 면을 고려하자면 유배 이후를 저작 시기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합니다.
유다인들은 주요 축제를 지낼 때 5개의 ‘축제 두루마리’ 혹은 ‘축제 오경’, 곧 룻기, 아가, 코헬렛, 애가, 에스테르기 등을 골라 낭독하였는데, 오순절 또는 수확절에는 특히 룻기를 봉독하였습니다. 그것은 수확이 한창인 어느 여름밤에 룻이 미래의 남편 보아즈를 만나는 감동적인 장면이 수확절에 잘 어울렸던 까닭입니다.
룻기에서 인상 깊은 것은 등장인물들이 고백하는 하느님께 대한 신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룻기는 ‘다윗의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이어지는 구세사의 한 연결 지점이 되기도 하는데, 그것은 룻이 낳은 아들 ‘오벳’이 ‘이사이’를, 이사이는 ‘다윗’을 낳았기 때문입니다. 다음 해설을 참조합니다.
“룻기에 확연하게 드러나는 바는 주님의 인도하심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룻기를 주님의 ‘섭리 이야기’라 할 수 있으며, 이 이야기의 원주인공은 주님이라 할 수 있다.
(1,8-9.13.21; 2,12.20; 3,10; 4,11.13-14 참조).
하느님께서는, 의지할 데 없는 한 늙은 여인, 특히 외국인 과부와 당신 사이의 개별적 역사를, 다윗의 탄생을 통하여 당신 백성과의 역사로 수렴하신다. 그리고 신약에 와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통하여 룻과의 역사를 당신과 인류 사이의 구원 역사로 끌어올리신다(마태 1,1-17).”(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주석성경 구약, 651쪽)
이방의 여인이 이스라엘의 백성이 되다
판관들이 다스리던 시대, ‘빵의 집’을 뜻하는 유다 ‘베들레헴’에 살던 ‘나오미’는 기근을 피해 남편과 두 아들과 함께 사해 건너 ‘모압’ 지방에 가서 10년쯤 살게 되었습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두 아들은 ‘오르파’와 ‘룻’이라는 (이방인인) 모압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나오미는 모압에서 10년가량 살았는데, 두 아들마저 세상을 떠나자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를 룻기는 이렇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돌보시어 그들에게 양식을 베푸셨다는 소식을 모압 지방에서 들었기 때문이다.”(룻기 1,6) 나오미는 하느님의 돌보심을 신뢰하고 희망하여 그간 정착하여 살던 곳을 떠나 유다 땅으로 돌아가기로 한 것이지요.
나오미는 두 며느리에게 하느님의 자애를 빌어주며 각자 제 어머니 집으로 돌아가길 바랐습니다. 이때 나오미는 자신과 함께 가겠다는 두 며느리를 만류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의 손에 얻어맞은 이 몸, 너희를 생각하면 내 마음이 너무나 쓰라리단다.”(룻기 1,13) 주님의 손에 얻어맞았다는 것은 나오미가 하느님을 원망해서 한 말이 아닙니다. 나오미는 자신이 남편을 잃고 두 아들마저 잃은 것에 대해 하느님을 원망하지 않고 신앙 안에서 담담히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오미는 오히려 떠나보내는 며느리들의 앞날을 생각하며 안타까워했습니다. 오르파가 시어머니의 말에 따라 작별을 고하자 나오미는 떠나려 하지 않는 룻을 재차 다그쳤습니다. 하지만 룻은 확고하게 말했습니다.
“어머님의 겨레가 저의 겨레요 어머님의 하느님이 제 하느님이십니다. 어머님께서 숨을 거두시는 곳에서 저도 죽어 거기에 묻히렵니다. 주님께 맹세하건대 오직 죽음만이 저와 어머님 사이를 갈라놓을 수 있습니다.”(룻기 16-17)
룻은 유다인이 아니었지만 자신을 시댁의 가족을 따라 유다인으로 여겼고, 자신이 모시던 시어머니가 믿던 하느님을 신앙했습니다. 그리고 굳은 결심으로 나오미를 설득하여 자신에게는 낯선 이방의 땅 베들레헴에 발을 들여놓았습니다. 나오미와 룻의 이주는 이렇게 하느님께 대한 신뢰에서 비롯하였으니, 시어머니에게 신앙을 받은 룻이 이제 신앙의 땅에 살게 되었습니다. 이방의 여인이 이스라엘의 백성이 되는 길에 들어선 것이지요. 우리도 그러합니다. 이방인과 같은 우리이지만 하느님에 대한 신앙 안에서 그분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불행까지도 받아들인 나오미의 신앙
“나 아쉬움 없이 떠나갔는데 주님께서 나를 빈손으로 돌아오게 하셨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그대들은 나를 나오미라고 부르나요? 주님께서 나를 거칠게 다루시고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불행을 안겨주셨답니다.”(룻기 1.21)
‘나오미’라는 이름은 ‘사랑스러움’, ‘사랑스러운 여자’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나오미는 이제 자신이 여러모로 불행한 여자가 되었으니 자신의 이름은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아쉬움 없이’란 본디 ‘가득 찬 채’를 뜻합니다. 즉 자신이 남편과 아들들과 함께 떠나갔었지만 이제 그들을 잃고 빈손으로 돌아왔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하느님께서 자신을 거칠게 다루셨다’는 히브리어 표현은 ‘하느님께서 자신을 거슬러 증언하셨다’는 말로 직역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증언하다’는 말은 흔히 ‘보여준다’ ‘드러낸다’는 뜻이니 “하느님께서 나를 거칠게 다루셨다.”는 나오미의 말은 “하느님께서 나의 뜻과는 다르게 자신을 보여주셨다.”라는 말로 이해되는 것입니다. 즉 하느님께서 나의 생각과 바람과는 다르게 모든 일을 섭리하셨다는 것이지요. 이는 나오미가 불행까지도 하느님에게서 기인하는 것으로 알아들었음을 드러내는 표현이라 할 것입니다. 나오미의 말은 결코 하느님에 대한 원망에서 나온 말이 아닌 것입니다.
나오미가 고향 사람들에게 한 말에서 그녀의 굳은 신앙이 드러납니다. 나오미가 하느님께서 자신을 거칠게 다루시고 불행을 안겨주셨다고 해서 하느님을 저주하거나 원망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나오미는 남편과 두 아들까지 잃고 당장 하루하루의 생계를 걱정해야 할 신세가 되어서도 하느님을 원망하지 않고 모든 상황을 담담히 받아들였으며, 그토록 엄청난 아픔과 슬픔에 처해서도 그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하느님을 신뢰하며 자신의 미래를 하느님께 맡겨드린 것입니다. 모든 것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사랑으로 참아내는 나오미에게서 참된 신앙과 삶의 자세를 배울 수 있습니다.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에게서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배웠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신앙으로 일치한 고부(姑婦) 사이는 얼마나 행복할까요?
제가 아는 한 자매님은 원래 개신교 신자였는데 천주교 집안에 시집을 왔습니다. 자매님은 시어머니가 개종을 권했지만 거절하며 살다가 매일 새벽에 기도를 열심히 드리시는 시어머니를 보면서 조금씩 가톨릭 쪽으로 마음이 움직였답니다. 그리하여 자매님은 천주교 세례를 받아 열심히 성당 활동을 하고 있는데, 시어머니가 보여주신 신앙의 모범에 늘 감사드리고 있다는 말을 했습니다. 고부 사이가 늘 좋을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고부간의 갈등은 신앙 앞에서 약해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부디 서로가 보여주는 신앙의 모범 앞에서 서로를 존중하고 일치하는 고부들이 많아지길 바랍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참으로 서로를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 하느님에 대한 신앙 안에서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