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와 병원의 수호성인, 성 카밀로 데 렐리스(축일 7월 14일)
성 카밀로 데 렐리스는 16세기 중엽에 이탈리아 남부의 나폴리 왕국에서 태어났다. 군인을 동경하던 성인은 발에 생긴 상처로 한 차례 연기한 끝에 입대하여 전투에도 몇 차례 참가했다. 20대 중반에 도박으로 빈털터리가 되고, 군에서도 제대한 성인은 방황하던 중 한때 카푸친 수도원의 공사장에서 일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수사의 설교를 듣고 수도자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거친 수도복에 발이 쓸리며 전에 생겼던 상처가 도지는 바람에 수련소에 들어갈 수 없었다.
이에 환자들을 보살피는 일에 투신했고, 병원의 회계를 담당하는 최고 관리자가 된 성인은 뜻을 같이하는 간호사들과 함께 공동체를 이루어 형편이 어려운 병자들을 정성으로 돌보았다. 그러던 중 주위의 권유로 사제품을 받았고, 함께 봉사하던 이들과 협조자들을 모아 ‘병자 간호 성직 수도회’를 세웠다. 흔히 카밀로회라 불리는 이 수도회는 청빈, 정결, 순명의 3대 서원 외에 ‘환자를 위한 정성 어린 간호’를 추가로 서원한다.
당시 유럽에서는 페스트가 유행했는데, 성인과 동료들은 페스트 환자들을 돌보면서 무엇보다도 병원의 청결을 중시하여 자주 창문을 열어 환기시키고, 알맞은 음식을 공급하고, 환자를 격리하여 전염을 방지하는 등 특화한 환자 돌봄을 펼쳤다. 그런 한편으로 숨을 거두는 환자들을 끝까지 곁에서 지켰고, 장례까지도 세심하게 챙겼다. 헌신적인 간호, 인격적 만남과 배려에 감동한 사람들은 “카밀로 신부의 품에서 죽으면 지옥에는 안 간다”라는 말로 성인에 대한 존경과 사랑을 드러냈다. 성인은 건강 악화로 총장직을 사임한 후에도 끊임없이 이탈리아 전역과 헝가리까지 확장된 수도회와 환자들을 위해 헌신했다.
암 환자의 수호성인, 페레그리노 라치오시(축일 5월 1일)
성 페레그리노 라치오시는 13세기 중엽 이탈리아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고, 젊은 시절 한때는 반(反)교황 단체에 가담해서 활동했다. 그러다가 설교를 통해 많은 사람을 신앙으로 이끈 성 필립보 베니티오를 만난 뒤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 성모 마리아께 자신을 봉헌한 성인은 환시 중에 성모님의 발현을 체험하고는 그분의 권유를 따라 시에나로 가서 ‘마리아의 종 수도회’에 입회했다. 그 뒤 장상의 명을 받들어 자신의 고향에 가서 수도원을 세웠다.
그런데 고행으로 성덕을 쌓으며 설교가와 고해 사제로서 직무를 충실히 수행하던 성인의 다리에 악성 혹이 생겼다. 차츰 증상이 악화하며 암 덩어리가 터지고 헐었다. 사람들은 혐오감을 느껴 다가오기를 꺼렸지만, 성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설교하고 미사를 봉헌하며 죄인들이 회개하도록 이끌었다. 결국 의사가 성인에게 발을 잘라야 한다고 말할 지경이 되었는데, 성인은 이러한 상황을 두고 기도했다. 그러자 갑자기 암의 모든 증상이 사라졌다. 이때부터 성인의 명성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성인의 다리에 생겼던 암이 기적적으로 치유됨으로써 성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된 것이다.
알코올 의존증에 시달리는 이의 수호성인, 성녀 모니카(축일 8월 27일)
성녀 모니카는 4세기 아프리카 북부의 그리스도교 신자 가정에서 태어나, 신심 깊은 부모 슬하에서 온순하고 심성 따뜻한 딸로 자랐다. 그리고 이른 나이에 이교인인 남성과 결혼하여 자녀 셋을 두었다. 성녀는 끊임없는 기도와 인내로써 마침내 권위적이고 난폭하며 방탕한 남편과 까다로우며 늘 며느리를 괴롭히던 시어머니를 회개시키고 개종시켰다. 남편은 세례 후 완전히 새사람이 되었으나 이듬해에 세상을 떠났고, 성녀는 혼자 힘으로 세 자녀를 키우며 집안을 꾸려나가야 했다.
세 자녀 중 맏이인 성 아우구스티노는 아버지를 닮아서 일찍부터 어머니의 속을 썩였다. 아우구스티노는 총명했으나 현세적인 성공을 최고의 가치로 여겼고, 어머니의 종교와 신심에는 무관심했다. 나아가 마니교 이단과 이교 철학에 빠져들었다. 게다가 여인과 동거하여 아이까지 낳았다. 이런 아들을 보며 성녀는 크게 마음 아파했고, 눈물을 흘리며 아들의 회심과 개종을 위해 기도했다. 성녀는 아우구스티노가 활동하던 로마와 밀라노까지 쫓아가서 아들의 방탕한 생활을 중지시키기 위해 온갖 수모를 참고 견디며 기도했다.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 덕분에, 그리고 밀라노의 주교이던 성 암브로시오의 도움에 힘입어 아우구스티노는 마침내 회심하여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세례를 받았다. 기도와 인내로써 아들을 여인과 술과 가무의 수렁에서 건져낸 성녀는 이제 아들 곁을 떠나 고향인 아프리카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리고 로마 근처의 어느 항구에서 배를 기다리던 중에 열병으로 숨을 거두었다.
정신 질환에 시달리는 이의 수호성인, 성녀 딤프나(축일 5월 30일)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성녀 딤프나는 7세기 아일랜드에서 이교도인 켈트족 족장의 딸로 태어났으나 그리스도인이던 어머니의 배려로 유아세례를 받고 그리스도교 신앙 교육을 받았다. 그리하여 어린 나이에 일찌감치 결혼하지 않고 자신을 그리스도께 봉헌하는 삶을 살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면서 시련이 밀려왔다.
아내를 몹시 사랑했던 아버지는 아내를 잃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차츰 광기를 보이기 시작했다. 재혼을 권유하는 측근의 요청을 받아들여 새로운 아내를 찾았으나 죽은 아내만 한 여성을 찾지는 못했다. 점점 죽은 아내만큼이나 아름답게 성장해 가는 딸을 보며 딸과 결혼하려는 끔찍한 생각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성녀는 이런 아버지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한 사제의 도움을 받아 오늘날의 벨기에 플랑드르 지방으로 피신했다.
성녀는 새 피신처에서 그 사제와 동료 2명과 함께 기도처를 세우고 은수 생활을 하며 그 지역의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돌보았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성녀의 아버지가 군인들과 함께 들이닥쳤다. 아버지는 군인들을 시켜 성녀에게 도움을 준 사제와 함께 지내던 동료들을 죽였다. 그러고는 성녀에게 아일랜드로 돌아가자고 강요했다. 성녀는 끝까지 돌아가기를 거부하며 저항했고, 분노한 아버지는 직접 칼을 뽑아 15살 된 딸의 목을 쳤다.
마을 사람들은 성녀와 동료들의 시신을 수습해서 가까운 동굴에 안장했다. 그리고 600년쯤 지난 13세기에 사람들이 동굴에서 빛나는 관에 안치된 시신을 발견했다. 그리하여 그곳에 성녀를 기리는 새로운 성당이 세워졌고, 유해는 새로운 무덤에 안장되었다. 그때부터 많은 순례자가 성녀 딤프나 성당을 찾아오기 시작했는데, 성녀의 무덤에서는 특별히 간질과 정신 이상으로 고통받던 이들이 기도하고 치유되는 기적이 많이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