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총이었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박창호 베드로 의정부 애덕의 모후 Re. 교육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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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매우 뜻깊은 자리에 함께했습니다. 이사를 하면 성당에 전입신고를 하고, 사무실에 제일 먼저 꾸리아 단장 연락처를 알려달라고 합니다. 그리고 단장이 추천해 주는 쁘레시디움에 전입해 단원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러기를 벌써 여섯 번째, 지금 소속된 쁘레시디움 일산 정발산성당 성모성심 Pr.이 지난 1월 10일 1500차 주회를 맞이한 것입니다. 
성모성심은 정발산성당 최초의 쁘레시디움입니다. 많은 어려움을 겪었음에도 30여 년을 지속하는 주회에 말석이지만 함께한 것은 기쁨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부단장으로 1500차 주회를 준비하면서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릅니다. 비록 삶이 고단하여 여러 쁘레시디움을 옮겨 다녔지만, 성모님은 부족한 저에게 축복을 안겨 주셨습니다. 본당의 다른 쁘레시디움 단장들에게 초대 전화를 하고, 간단한 저녁식사를 준비하면서 알 수 없는 기쁨이 넘쳐났습니다. 그들과 함께 주회를 할 때 성모님께서 살포시 오셔서 단원들과 함께하신다는 체험을 하기도 했습니다.

한때는 성직의 길을 꿈꾸기도 
오랜 신앙의 전통을 지닌 집안에서 태어난 저는 젊었을 때 사제의 꿈을 품고 신학교를 다니기도 했습니다. 기억의 흔적을 따라 신학교 입학할 때를 떠올려 봅니다. ‘나는 신부가 되어 무엇을 하겠다’라는 다짐으로 그 길을 선택했습니다. 신학교를 입학하면 교가를 배웁니다. “진세를 버렸어라, 이 몸마저 버렸어라”로 시작되는 노래입니다. 당시에는 그 뜻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세상도 버리고, 거기다가 이름마저 버리라니...’ 사제 성소는 세상도, 이름마저 버리고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님을 나중에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4년간 신학생 때 또 하나 부끄럽기만 한 경험이 있습니다. 레지오 활동을 하는 신학생 친구들을 보면서 “예수님이 중요하지 뭔 레지오냐”라며 외면하고 비아냥대기도 했습니다. 이런 생각이 얼마나20240314160450_1245746787.jpg 잘못된 것인지 가끔 이때를 떠올리면 부끄럽기만 합니다. 디모테오1서 6장 4절의 말씀처럼 “교만해져서 아무것도 깨닫지 못할 뿐만 아니라 논쟁과 설전에 병적인 열정을 쏟았던” 것입니다. 다시 교회 역사를 공부하면서 그리스도교에서 성모님에 대한 공경이 초대교회부터 오늘날까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교만하고 무지했던 저를 성모님께서는 조용히 부르셨습니다. 1997년도에 부모님과 함께 서울에서 분당으로 이사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성당의 레지오 단원들이 부친의 레지오 입단을 권유하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그 레지오 단원들은 이런저런 사정을 듣고 레지오 입단을 요청했습니다. 아무 연고도 없이 적적하게 지내던 상황에서 비슷한 또래 단원들의 입단 권유에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레지오 입단과 동시에 성당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신자들은 신학교 출신이라는 특수(?)한 사람으로 대해주었습니다. 거기에 편승해 저는 사목회, 꾸르실료, 교리교사, 전례 등 요청하면 어떤 일에도 거절하지 않고 “예”하고 대답하였습니다. 4~5년 동안은 직장에서 퇴근하면 성당에 다시 출근할 정도로 교회 봉사에 매달렸습니다. 아내와 주위 친구 신부들이 “그렇게 열심히 할 거면 사제가 되지 그랬냐”면서 핀잔 아닌 핀잔을 주기도 했습니다. 레지오에서도 간부로 지명되면 무조건 승낙했습니다. 그러다가 수원 레지아 교육위원으로 임명되어 레지오 마리애의 역사와 성모님의 신심에 대해 단원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했습니다. 
직장 일도 만족스러웠습니다. 2001년부터 서울대교구 민족화해위원회에서 일하면서 어려운 북한 동포를 돕는 인도적 지원을 했습니다. 민족화해위원회는 1995년 당시 서울대교구 교구장이셨던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만든 단체입니다. ‘고난의 행군’이라 일컫는 시기에 북한에서는 수십만 명이 굶어 죽어 갔습니다. 그들을 돕기 위해 모니터링 차원에서 북한을 방문할 때마다 얼마나 가슴앓이했는지 모릅니다. 당시 북한 동포들은 형언할 수 없는 처참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직장에서도, 성당에서도 행복한 생활의 연속이었습니다.

순명과 겸손을 배워가며…
그러나 그런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저에게는 딸만 한 명 있습니다. 늦게 결혼해서 얻은 딸은 초등학교 졸업할 때 성남시장상을 받을 정도로 명석했습니다. 주일미사에 해설을 하는 등 신앙생활도 열심히 했습니다. 그런 딸을 아내와 6학년 담임선생님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중학교를 대안학교로 보냈습니다. 일등 지상주의에 매몰되어 성적 하나로 인간을 규정하는 획일적인 우리 교육이 싫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딸은 대안학교을 다니며 자기가 가진 재능을 마음껏 발휘하며 잘 지냈습니다. 그러다가 대안학교가 고등학교 3학년 때부터 입시교육으로 전환하면서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학생회 간부였던 딸은 학교 정책에 격렬하게 반대하였고, 결국에는 자퇴하고 말았습니다. 그 충격 여파를 보듬어 주지 못한 결과로 조현병(調絃病)에 걸려 정신병동에 입원했습니다. 12년 전의 일이었습니다. 애지중지 키워왔던 딸의 병은 뼈를 깎는 아픔이었습니다. 어찌할 수 없어 딸을 붙들고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 모릅니다. 주님께도, 성모님께도 “왜 이런 시련을 나에게 주시냐”고 수없이 원망도 했습니다. 좌절의 늪에서 허우적대면서도 레지오는 계속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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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딸이 많이 좋아졌지만 10년을 넘게 지나고 나서야 어렴풋이 성모님께서 그 아픔에 함께하셨음을 체험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감당할 만큼의 시련을 주신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에게 닥친 시련은 인간으로서 이겨내지 못할 시련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성실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여러분에게 능력 이상으로 시련을 겪게 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시련과 함께 그것을 벗어날 길도 마련해 주십니다.”(1코린 13,13)
살아온 삶을 돌이켜보면서 제 신앙을 성찰해 봅니다. 레지오에 입단한 지가 28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영광스럽게 의정부교구 애덕의 모후 레지아 교육위원으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지난 시기에는 몰랐지만 지금, 레지오는 “단원의 성화를 통하여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데 있다.”(교본 제2장 목적)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나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나의 성화를 통해 하느님을 드러내는 삶은 성모님께서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천사가 예수님을 잉태하였다고 전하자 성모님께서는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라고 말씀하십니다, 죽음마저 이기고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신 성모님의 순명, 그 순명을 따르기 위해 기도드립니다. 
“무슨 일에나 이기적인 야심이나 허영을 버리고 다만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십시오.”(필리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