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말, 대림시기를 보내던 어느 밤에 후배 신부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강대건 라우렌시오 선생님이 뇌출혈로 쓰러져 가까운 병원 응급실에 가셨다는 이야기였죠. 불과 몇 달 전 강 선생님과 전화로 통화한 것이 생각났어요.
“신부님 저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힘들어서 옛날 생각하며 거의 집에서 지내고 있어요. 신부님 전화 주셔서 고맙습니다. 건강하게 지내셔서 오랫동안 신자들을 위해 사목하세요” “네. 선생님 고맙습니다. 다음에 또 연락드릴게요.” 선생님은 사제들을 만날 때면 늘 같은 이야기를 하셨어요. 사제가 건강해야 좋은 사목을 할 수 있다고요. 나는 후배 신부님에게 다시 전화해 아무래도 서울성모병원으로 옮기면 좋겠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강 선생님과 친분이 있으셨던 염수정 추기경님께 바로 연락을 드렸습니다. 강 선생님은 쓰러진 다음 날 선종하셨습니다.
안타까운 선종 소식에 이제는 쉼 없이 고단하게 일하시던 세상을 떠나 주님 품 안에서 안식을 누리시기를 기도했어요. ‘한국의 슈바이처’로 불린 강대건 라우렌시오 원장님은 평생을 드러나지 않게 한센인들을 무료 진료한 치과의사입니다. 12월 8일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 예식실에서 구요비 욥 주교님의 주례로 장례미사가 엄수됐습니다.
주교님은 “신학생 때 진료를 받을 때면 ‘학사님, 사제가 건강해야 오래 신자들을 사목하니 신학생 때부터 건강에 더 신경 쓰세요’라는 말씀이 기억난다”라며 강론 도중 여러 차례 말을 잇지 못하셨습니다. 강 원장님은 오랫동안 신학생들과 수녀님들의 구강 검사를 하시고, 치료나 보철 등도 모두 무료로 해주셨습니다. 나도 신학과 1학년 때 강 선생님의 치과에 갔는데 대기실의 환자들은 모두 신부님, 수녀님, 신학생들뿐이었어요. 그때 친구에게 “아니 저렇게 공짜로 다 치료해 주시면 어떻게 돈을 버시지?” 하며 의아해했던 기억이 납니다.
강 원장님께 보철치료 받았던 이를 수십 년이 흐른 후 다른 병원에서 손을 보게 됐는데 의사 선생님이 “이렇게 튼튼한 보철은 처음 본다”라며 놀랄 정도였습니다. 어려웠던 시절 경제 상황이 좋지 않아 치과 치료는 꿈도 못 꾸었던 신학생과 수도자들에게 강 원장님은 고마운 은인(恩人)이자 천사였어요.
30년 넘게 한센인에게 치과 치료 봉사
내가 교구 홍보를 담당할 때 어느 주일에 선배 신부님께 전화가 왔습니다.
“허 신부, 강대건 원장님 알지? 30년 넘게 한센인에게 치과 치료 봉사를 하시고 얼마 전 은퇴를 하셨지. 가톨릭 한센인들의 모임인 한국가톨릭자조회(自助會)가 강 원장님에게 내일 감사패를 드리게 됐어. 그동안에는 언론에 나가는 것을 극도로 꺼리셔서 조용히 봉사하셨는데, 내일 일정은 아무래도 교계 언론에 알렸으면 해.”
“아, 네 알겠습니다. 신학생들과 수녀님들의 치과 치료는 알았지만 그렇게 오랫동안 한센인들을 치료하셨다는 말씀은 처음 들었습니다.”
나는 교계뿐 아니라 일반 언론에도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2013년 5월 6일 강대건 치과에는 감사패를 전달하기 위해 한센인들이 속속 모였고, 이 의미 깊은 날은 TV 뉴스와 신문 지면을 통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1957년 서울대 치과대학을 졸업한 강대건 선생님은 1963년 서울 서대문구 영천시장 입구에서 치과를 열었습니다. 어느 날 다른 치과에서 쫓겨난 한센인을 치료해 준 것이 첫 인연이 되었습니다. 생전의 강 원장님은 “치과 앞 길바닥에 쫓겨나 허공을 바라보던 한센인의 모습을 잊지 못한다”라고 회상했습니다.
강 원장님은 그 일을 계기로 한센인들을 무료로 진료하고 보철을 해주었답니다. 당시 전국 100여 개의 한센인 마을은 인적이 드문 깊은 산속에 있어서 방방곡곡 찾아 봉사했습니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병원에서 진료하고 일요일이면 새벽 미사를 드린 후, 기차를 타고 전국의 한센인을 치료하러 다녔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식구들이 감염을 우려할까봐 아내도 모르게 봉사를 다녔습니다.
한센인 무료 진료는 2012년까지 33년간 이어졌습니다. 강 원장님의 진료를 받은 한센인은 1만 5천 명, 틀니를 해준 것만도 5천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강 원장님은 비용과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치과기공사 면허증을 따서 직접 보철물을 만들었습니다. 보철물과 틀니를 만드는 것은 일과가 끝난 다음에 하니 자유로운 시간은 하나도 없었던 셈입니다.
평생의 삶을 어려운 이웃들에게 모두 바쳤던 강 원장님은 수도자 같은 삶을 사셨습니다. 진료 중간에 시간이 조금 비어도 항상 묵주기도를 바치곤 했지요. 강대건 원장님은 가족들에게 늘 미안해하셨습니다. 낮엔 진료하고, 밤에는 보철물 만드는 일이 이어졌고, 강 원장님 병원에는 항상 일반 환자보다 어려운 환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니 치과 내부 인테리어 등은 수십 년째 그대로였습니다.
2013년 ‘교회와 교황을 위한 십자가 훈장’ 수훈
강 원장님은 처음에는 형편이 어려운 이들을 전액 무료로 진료해줬지만 주변의 권고로 최소한의 비용을 받았습니다. 공짜로 하면 미안한 마음에 다음 치료를 받으러 오지 않는 경우가 많아 최소한의 ‘자존심 값’을 받기로 한 것입니다. 모든 재정은 김득권 신부님에게 맡겼고, 남은 진료비도 얼마간 모이면 아프리카 교회에 보냈습니다.
강 원장님의 은퇴식 후 나는 당시 교구장인 염수정 추기경님께 보고를 드렸고, 염 추기경님은 바로 교황청에 훈장 신청을 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강 원장님의 공로를 인정해 주셨고, 2013년 ‘교회와 교황을 위한 십자가 훈장’을 내려주셨습니다. 강 원장님의 선행과 교황 훈장 수훈 소식은 주위에 널리 퍼져나가 그해 말에는 ‘2013년 올해의 치과인상’과 국민훈장 모란장도 받았고 다른 수상자들과 함께 청와대에 초청되어 대통령 옆에서 만찬도 하셨습니다.
나는 아직도 강대건 원장님이 받게 될 가장 큰 상이 남아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늘나라에서 받게 될 큰 상이지요. 주님께서 “그동안 수고 많았다. 정말 잘했다” 하시면서 꼬옥 안아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