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뭐라꼬예?
판관기의 마지막 이야기
왕조 창설의 필요성(2)
조현권 스테파노 신부 대구대교구

이스라엘에 임금이 없던 시대의 악행 
에프라임 산악 지방의 구석진 곳에서 나그네살이하던 레위인이 유다 땅 베들레헴에서 어떤 여자를 소실로 맞아들였는데, 어느 날 둘 사이에 다툼이 생겨 화가 치밀어 오른 아내가 친정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남편은 넉 달이 다 되도록 아내가 돌아오지 않자 사돈댁으로 아내를 찾으러 갔습니다. 장인은 함께 먹고 마시며 사위를 극진히 대접하면서, 계속해서 사위에게 하룻밤만 더 묵어가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사위는 다섯째 되는 날 해가 저물 때야 아내와 종들을 데리고 집을 나설 수 있었습니다. 
늦은 시간에 길을 떠난 그들은 멀리 가지 못하고 하룻밤 묵을 곳을 찾아야 했는데, 마침 지나게 된 마을은 이방인인 여부스족이 사는 곳이라 들어가지 않고 동족이 있는 곳까지 발걸음을 재촉하였습니다. 마침내 해가 진 시각에 그들은 벤야민 지파에 속하는 기브아에 이르러 성읍 광장에 앉았습니다. 하지만 어느 집도 그들을 맞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마침 에프라임 산악 지방 출신으로 기브아에서 나그네살이 하던 한 노인이 그들을 자기 집으로 데리고 들어갔습니다. 
노인이 그들을 대접하고 있는데 성읍의 불량한 남자들이 와서 “당신 집에 든 남자를 내보시오. 우리가 그자와 재미 좀 봐야겠소.” 하였습니다. 이에 집주인이 자신의 처녀 딸과 손님의 소실을 내보낼 터이니 손님에게만은 추잡한 짓을 말아 달라 하였습니다. 그래도 남자들이 뜻을 굽히지 않자 손님인 레위인이 자기의 소실을 붙잡아 밖으로 내보냈습니다. 불량한 남자들은 밤새도록 그 여자를 농락하다 동이 틀 때야 놓아주었습니다. 다음날 레위인이 노인의 집 문간에 쓰러져 있던 소실을 발견하였으나 그녀는 이미 죽어있었습니다. 이제 죽은 소실을 나귀에 싣고 자신의 고장으로 돌아온 그는 시신을 열두 토막 내어 이스라엘의 온 영토에 보냈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동족 가운데 악행이 행해졌고 비극적인 전쟁으로 이어졌습니다.
이 이야기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볼 때 이해하기 어려운 면이 있습니다만, 국가 조직이나 사법 체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던 당시의 상황을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집주인에게는 손님에게 음식과 잠자리를 제공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의 신변까지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었기에 자신의 딸과 손님의 소실을 내어놓으면서까지 자신의 명예를 지키려 했고, 손님은 자신의 소실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집주인의 딸과 집주인을 보호하려고 한 면이 있다는 것입니다. 
판관기가 이 이야기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가 결코 큰 악을 피하기 위해 작은 악은 용인할 수 있다는 주장일 수는 없습니다. “왕이 없던 시대에는 이렇게 잘못된 일이 생겨나니 법을 집행할 국가 조직을 이끌 왕을 세울 필요가 있지 않은가?” 판관기의 의도는 이런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에 임금이 없던 시대의 동족상잔(同族相殘)
분개한 이스라엘의 자손들이 시신토막을 보낸 레위인을 찾아와 자초지종(自初至終)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에서 저질러진 추잡한 짓을 응징하기로 결의하고, 먼저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 사람에게서 10분의 1을 뽑아 벤야민 땅 기브아 사람들을 응징하러 가는 군사들이 먹을 양식을 가져오게 하였습니다. 
그런 다음 벤야민 지파에게 사람들을 보내 기브아의 불량한 자들을 처단할 수 있도록 자기들에게 넘기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벤야민 자손들은 동족인 이스라엘 자손들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고, 기브아 주민들 외에 2만6천 명의 군사가 모였습니다. 
벤야민 지파를 제외한 이스라엘 군사들은 40만 명이었는데, 그들은 (예루살렘 북쪽 17킬로미터 지점, 예루살렘에서 스켐으로 가는 길에 있던) 베텔 성소로 올라가서 하느님께 여쭈었습니다. “저희 가운데 누가 먼저 올라가서 벤야민의 자손들과 싸워야 합니까?”(판관 20,18) 그러자 하느님의 대답은 “유다가 먼저 가거라.”였습니다. 그리하여 과연 유다가 먼저 나섰는지 성경은 말하지 않고 있으나 그날 이스라엘의 군사 2만2천 명이 벤야민의 군사들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자손들은 거듭 베텔로 올라가서 저녁때까지 하느님 앞에서 통곡하고 다시 여쭈었습니다. “저희가 저희 동족인 벤야민의 자손들과 다시 싸우러 가야 합니까?”(판관 20,21) 
하느님으로부터 “그들을 치러 올라가거라.”는 대답을 들은 이스라엘 군사들은 새롭게 용기를 내어 벤야민의 군사들과 싸우러 나갔습니다. 하지만 둘째 날에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1만8천 명의 군사를 잃었고, 그들은 다시 베텔로 올라가 하느님 앞에서 통곡하였습니다. 
저녁때까지 단식하고 번제물과 친교 제물을 바친 그들은 또 하느님께 여쭈었습니다. “저희가 저희 동족인 벤야민의 자손들과 다시 싸우러 나가야 합니까?”(판관 20,28) 그러자 하느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올라가거라. 내일 내가 그들을 너희 손에 넘겨주겠다.” 이제 사흘째 되는 날 이스라엘 군사들은 대부분을 기브아 둘레에 숨겨둔 채로 소수의 병력만을 싸움터에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첫 전투에서 패배해서 도망하는 척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군사들이 벤야민의 군사들을 기브아의 성읍으로부터 멀리 유인해 낸 후 매복해 있던 군사들로 그들을 쳤습니다. 
판관기는 이스라엘 군사들의 승리를 이렇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마침내 주님께서 이스라엘 앞에서 벤야민을 치셨다. … 그제야 벤야민의 자손들은 자기들이 패배한 것을 알았다.”(판관 20,35) 기브아 쪽에 배치된 이스라엘 복병들도 같은 식으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리하여 기브아 주민들을 비롯한 벤야민 사람들 대부분이 목숨을 잃었지만 그 가운데 6백 명은 광야 쪽 ‘림몬 바위’로 도망쳐 목숨을 구했습니다. 벤야민 지파 성읍들의 주민은 대부분 몰살당하였지만 아직 6백 명의 남자들이 남아있었던 것입니다. 
판관기의 후반부는 과거 이스라엘에서 벌어진 동족상잔의 역사를 전하며, 그러한 비극이 이스라엘에 왕이 없던 시대였기에 행해진 것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판관기는 그 시대에 하느님의 계약 궤가 베텔에 있었고, 아론의 손자들이 그 궤를 모시고 있었음을 밝히면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동족인 벤야민 자손들과 싸움에 임하면서 계약 궤가 있는 베텔 성소에서 하느님의 뜻을 지속적으로 찾았음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과연 하느님의 뜻을 구한 이스라엘 자손들은 승리를 거두었으나 그렇지 않은 벤야민 자손들은 패배를 당하였습니다. 패배한 벤야민 자손들에게도 하느님께서는 구원하시는 손길을 거두지 않으셨습니다. 판관기가 전하는 동족상잔의 비극 가운에서도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의 은혜는 계속되었던 것입니다.

패배한 벤야민 지파에 대한 배려
벤야민 자손들과의 싸움이 끝나자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무도 벤야민 사람에게 딸을 아내로 내주지 않는다.”라고 맹세하였는데, 넉 달쯤 시간이 흐르자 이제 이스라엘의 한 지파가 없어지게 된다는 문제로 심각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에 백성은 베텔 (혹은 미츠파)로 가서 하느님 앞에서 통곡하며 말하였습니다. “주 이스라엘 하느님, 어찌하여 이스라엘에 이런 일이 일어나, 오늘 이스라엘에서 지파 하나가 없어져야 한단 말입니까?”(판관 21,3) 이튿날 백성은 그곳에 제단을 쌓고 번제물과 친교 제물을 바친 다음, 자기들의 동족 벤야민을 애석하게 여겨 살아남은 벤야민의 남자들에게 아내를 구해줄 방도를 찾았습니다. 
그들은 우선 베텔 (혹은 미츠파)의 집회에 참가하지 않은 야베스 길앗 주민들을 처단하면서 남자와 잠자리를 모르는 어린 처녀 4백 명을 실로의 진영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이어서 그들은 림몬 바위에 있는 벤야민의 자손들에게 사람을 보내어 평화를 선언한 후, 돌아온 벤야민 자손들에게 살려 둔 길앗의 여자들을 내주었습니다. 하지만 6백 명의 남자에게 4백 명의 여자는 모자랐고, 이에 이스라엘 자손들은 실로에서 해마다 열리는 주님의 축제에서 (아직 여자가 없는) 벤야민의 남자들이 (포도밭에 숨어 살피다가 춤을 추러 나오는) 실로의 여자들을 (모자라는 수만큼) 잡아 벤야민 땅으로 돌아가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벤야민 지파는 춤추는 여자들을 납치하여 종족을 이어가게 되었습니다. 
이에 관한 판관기의 마지막 문장입니다. “그 시대에는 이스라엘에 임금이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저마다 제 눈에 옳게 보이는 대로 하였다.”(판관 21,25) 판관기는 그 후반부에서 이렇게 왕정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