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영하는 자신의 시칠리아에서의 생활을 진솔하고 역사적인 스토리 텔링을 통해 재미있게 적은 ‘오래 준비해온 대답’에서 ‘신전’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신전이라는 말에는 태생적으로 아이러니가 있다. 신전은 신이 사는 집이지만 실은 인간이 지은 것이다. 신전은 인간 스스로가 상상해낸, 크고 위대한 어떤 존재를 위해 지은 집이다. 그러나 인간이 지어 올렸기에 이 집들은 끝내 돌무더기로 변해버린다. 세월이 지나면 무너진다는 것, 폐허가 된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신전이라는 건축물의 운명이다.”
‘신전’을 인간의 건축물이라는 관점에서는 세워졌다가 폐허가 되지만, ‘신이 머무는 곳’이라는 개념으로 접근한다면 또 다른 연속성을 지니게 됩니다.
‘신전’하면 떠오르는 곳은 어디가 있을까요?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파르테논 신전, 로마의 카피톨리노 언덕 유피테르 신전, 시칠리아의 아그리젠토 신전의 계곡 등이 유명하지요. 신자라면 아무래도 예루살렘 성전이 생각날 것이고요. 그런데 그런 신전들은 유적으로만 남아있지 그에 합당한 예배를 드리는 곳은 없습니다. 구약에서 ‘신이 머무는 곳’은 어떻게 변화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하느님이 선택했다는 표지인 거룩한 장소!
구약에서 거룩한 장소는 다른 모든 종교에서와 마찬가지로 신의 현존과 행위가 드러난 곳이었으며, 특히 선택의 표지였습니다. 곧 온 땅의 하느님께서 특별한 한 장소에 나타나시고, 특별히 한 백성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신성한 장소는 성서적 종교를 특징짓는 두 개의 긴장 요소인 ‘하느님의 불가시성과 가까운 현존’ 및 ‘보편성과 고유성’이 함께 하는 장소입니다.
기원전 13세기 모세는 장인 이트로의 양 떼를 치다가 호렙산으로 갔습니다. 하느님의 산인 호렙산은 산 전체가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주님께서는 불타는 떨기나무를 보고 다가오는 모세를 부르시고 “이리 가까이 오지 마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탈출 3,5)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신발을 벗는 것은 거룩한 공간과 세속의 공간을 나누는 행위입니다. 유다인들은 성전에 들어가기 전에 신발을 벗었으며, 이슬람의 모스크에는 오늘날에도 신발을 벗고 맨발로 들어가 꿇고 엎드려 기도합니다. 이렇듯 하느님은 형언할 수 없는 표지를 통해 거룩한 장소로 모세를 부르시고 그를 이스라엘의 선지자로 선택했습니다.
야곱의 ‘하느님의 집’ 베텔!
‘하느님의 집’인 성당을 제일 처음 세운 사람은 아마도 야곱일 겁니다. 야곱이 어떤 곳에서 돌을 베고 누워 자다가 하늘까지 닿는 층계를 꿈꾼 체험에 그 기원이 있습니다(창세 28,10-22). 야곱은 그 자리에 머리에 베었던 돌을 기념 기둥으로 세우고, 그 꼭대기에 기름을 부어 ‘이곳’이 ‘하느님의 집’, ‘하늘의 문’(창세 28,17)이라 말하며 주위와 격리된 거룩한 장소로 만들었습니다. 기름 부음을 받은 기념 기둥은 크리스마 성유 바름과 기도를 통해 축성되는 성당의 제대를 암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회화로는 1578년에 틴토레토가 그린 ‘야곱의 사다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다리가 아니라 돌계단이 하늘로 이어져 있으며 신비한 구름에 감싸여 있는 저 끝에는 하느님이 내려다보고 계시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영적인 차원에서 요한 클리마쿠스(+649)가 쓴 ‘천국의 사다리’는 수도승 영성을 종합한 작품으로 ‘신적 빛에 의한 인간의 신화(神化)’에 이르는 길을 제시합니다. 곧 영성적 삶의 계단을 하나하나 오르다 보면 언젠가는 하느님과 일치하리라는 희망 속에서 삶에서 만나는 계단들을 어떻게 올라가야 하는지를 수도승의 지혜로 설명해주고 있는 책입니다.
하느님이 주도하여 건립한 성막!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탈출시킨 하느님은 시나이산에서 모세에게 스스로 백성 가운데 살고자 하는 소망을 드러냅니다. “그들이 나를 위하여 성소를 만들게 하여라. 그러면 내가 그들 가운데에 머물겠다.”(탈출 25,8) 그리고 성소 건립을 위한 세세한 지시까지 주십니다. “내가 너에게 보여주는 성막의 모형과 온갖 기물의 모형에 따라 모든 것을 만들어라.”(탈출 25,9) 예를 들면 계약 궤는 아카시아 나무로 만들고 “길이는 두 암마 반, 너비는 한 암마 반, 높이도 한 암마 반으로 하여라. 너는 그것을 순금으로 입히는데, 안팎을 입혀라. 그 둘레에는 금테를 둘러라”(탈출 25,10-11)라고 합니다. 그분은 자신이 제안한 계획을 완벽하게 수행하기 위해 자신이 선택한 기술자에게 자신의 영을 보내십니다(탈출 31,1-11; 37,1-9).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현존을 드러내고 이스라엘 민족과 계약을 맺었음을 알리는 ‘계약 궤’가 있는 곳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위하여 모세에게 명령할 모든 것을 일러주겠다”(탈출 25,22)라고 하십니다. 성막은 공간이 세 부분, 뜰, 성소, 지성소로 나뉩니다. 성소에는 사제가 들어가고 지성소에는 대사제만이 들어갈 수 있지만, 성막의 뜰에는 이스라엘 백성 누구나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번제 제단이 있는 성막 뜰에서 백성은 “환호의 희생 제물을 봉헌하고 주님께 노래하며 찬미”(시편 27,6)를 드렸습니다.
세 번에 걸쳐 지어진 예루살렘 성전!
다윗이 계획한 성전은 그의 아들 솔로몬에 의해 기원전 968년에 시작하여 7년 후에 완성됩니다(열왕 6-8장; 2역대 1,18-5,1). 그 후 바빌론이 성전을 파괴했고,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의 칙령에 의해 유배에서 돌아온 유다인들과 함께 즈루빠벨이 성전을 기원전 520-515년 다시 지었습니다(에즈 5,1 이하). 그러나 이 성전은 기원전 169년 시리아의 안티오코스 4세에 의해 다시 파괴되었고 기원전 20년부터 대 헤로데가 세 번째로 성전을 재건했습니다. 이 성전은 기원후 63년경 헤로데 아그리빠 2세 때 완공되었으나 유다전쟁(66-70년)에서 로마군에 의해 완전히 폐허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헤로데 성전’에 가셔서 하느님께 기도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다른 이교도 신들과 달리 하느님은 성막이나 성전에만 거처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민족으로는 처음으로 성전을 봉헌한 솔로몬의 말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어찌 하느님께서 땅 위에 계시겠습니까? 저 하늘, 하늘 위의 하늘도 당신을 모시지 못할 터인데, 제가 지은 이 집이야 오죽하겠습니까?”(1열왕 8,27)
이스라엘의 성전은 사람과 하느님의 관계를 유지하기에 충분하지 않았으며, 예언자들은 삶과 분리된 번제물 봉헌에 대해서 비난했습니다. “무엇하러 나에게 이 많은 제물을 바치느냐? … 너희가 나의 얼굴을 보러 올 때 내 뜰을 짓밟으라고 누가 너희에게 시키더냐? 더 이상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마라. … 너희의 손은 피로 가득하다.”(이사 1,11-15). 신약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살아가는 삶이 또 다른 성전임을 예수님은 확인시켜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