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주의라는 이데올로기
사람은 가족 공동체 속에서 태어납니다. 사람은 가족을 통해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를 처음으로 경험하고 배웁니다. 신앙의 관점에서 보면, 가족은 기초 교회 공동체입니다. 세속적 시각이든 신앙적 시각이든 간에 가족은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핵심 공동체라는 뜻입니다. 가족의 구성과 유지가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는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인간에게 가정은 생존과 사회적 삶을 위한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가족 공동체 안에는 부부관계, 부모와 자녀라는 관계, 형제와 자매라는 관계가 존재합니다. 가족 공동체는 혼인 계약과 혈연으로 구성되는 공동체입니다. 혼인 계약을 통해 맺어지는 관계가 어떤 의미와 특성을 갖는 것인지, 핏줄이라는 관계가 갖는 의미와 속성이 무엇인지, 섬세하게 물어보면 답을 찾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그저 우리는 가족 관계가 중요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말할 뿐입니다.
오늘날 모든 사회적 공동체가 사라지고 경쟁만 남아있는 세상에서, 가족은 생존을 위한 최후의 보루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 사회는 공공의 역할까지 가족에게 떠넘겼고 극심한 경쟁사회에서 살아남는 것은 ‘가족 총력전’이 되다시피 했습니다.”(김희경, ‘이상한 정상 가족’, 동아시아, 2017) ‘가족주의’라는 개념이 공동체의 상징이라기보다는 집단적 이기주의를 상징하는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내 새끼 지상주의’라는 말이 시사하듯이, 오직 자기 가족의 안녕과 행복을 위해 분투하는 가족이기주의만 난무하는 세상이 되어버렸습니다. 가족 공동체에서 공동체적 품성을 배우고 키워서 세상 공동체의 형성에 기여하고 헌신한다는 이상(理想)은 한낱 신기루에 불과한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비혼과 저출산으로 가족이 해체되고 있습니다. 기존 질서를 토대로 하는 완강한 가족주의와 생존 경쟁을 위한 가족이기주의에 대한 깊은 반성과 성찰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가족 공동체에 대한 건강한 인식과 가족 공동체 대한 새로운 모색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공동체를 향한 교회의 이상과 꿈은 많은 어려움에 봉착하게 될 것입니다.
가족은 혼인 계약을 통해 시작됩니다. 건강한 가족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계약에 대한 충실성이 요청됩니다. 계약은 신뢰와 충실성을 담보하지 않으면 형식적인 것이 됩니다. 과연 오늘의 혼인 계약들이 어떤 방식으로 지속되고 유지되는지에 대한 정직한 분석과 또 어떻게 그 계약을 충실히 실천할 수 있는지에 대한 깊은 성찰이 필요합니다. 참된 가족 공동체는 핏줄의 한계를 뛰어넘어야 합니다. 물론 사람은 핏줄의 인연을 소중히 여기고 잘 키워가야 합니다. 하지만 핏줄의 인연에만 사로잡힌다면, 혈연이기주의라는 위험에 빠지기 쉽습니다. 예수님 역시 혈연적 이기주의, 가족이기주의에 대해 강하게 질책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르 3,35)
입양과 위탁을 통한 가족 공동체의 형성
교회는 남녀의 혼인을 통해 가족이 형성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남녀의 혼인은 단순히 계약을 넘어 성사의 차원으로 확장됩니다. 결혼과 출산이 가족 공동체 형성의 핵심이지만, 교회는 불임으로 인해 자녀를 갖지 못한 부부 역시 그 자체로 가족 공동체임을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혼인은 출산만을 위하여 세워진 것이 아닙니다. ··· 그러므로 가끔 간절히 바라는 아이가 없더라도 혼인은 온 생애의 공동생활과 친교로서 지속되며, 그 가치와 불가해소성도 보존됩니다.”(‘사랑의 기쁨’, 178항)
가족은 다양한 방식으로 형성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입양과 위탁을 통한 가족 공동체 형성을 강조합니다. 교회는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입양은 모성과 부성을 매우 너그러운 방식으로 실현하는 길입니다.” “아이를 입양하는 것은 사랑의 행위이며, 가정이 없는 아이에게 가정이라는 선물을 주는 것입니다.”(179항) 입양과 위탁은 혈연이라는 한계를 넘어 확장된 사랑을 통한 가족 공동체 형성입니다. 교회는 언제나 신앙과 사랑을 통한 열린 가족 공동체의 확장을 지향합니다.
확장된 가족 공동체 – 세상의 가정화
교회는 가족 공동체의 사랑과 풍요가 세상을 향해 확장되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가정의 사랑과 풍요가 세상 속에서도 실현되기를 바라고 또 지향합니다. 교회는 가정을 “개인과 사회가 결합되는 자리이며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이 연결되는 지점”(181항)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가정이 사회로부터의 도피처로 전락해서는 안 됩니다. 가정은 다른 가정들과 또 세상과 연결되어 있을 때 건강해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와 요셉과 함께 외부에 닫혀 있는 배타적인 관계에서 성장하신 것이 아니라 부모님의 친척과 친구들을 포함한 넓은 의미의 가족과 기꺼이 교류하셨습니다.”(182항)
가족은 자기 폐쇄성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향해 열린 공동체가 되어갈 때 진정한 가족 공동체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가정에 세상을 ‘가정화’하는 일을 맡기시어 모든 이가 서로를 형제자매로 여기도록 하셨습니다.”(183항) 즉, 세상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자녀로서 서로서로 형제자매가 되는 삶을 살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가족 공동체는 언제나 사회적 차원으로 확대되어야 합니다.
신앙의 가정은 세상을 향한 의무와 책임이 있습니다. 신앙의 “가정은 그들의 증언과 이야기로 다른 이들에게 예수님을 말해주고, 신앙을 전하며, 하느님에 대한 갈망을 일으키고, 복음과 그 복음이 제안하는 삶의 아름다움을”(184항) 보여주어야 합니다.
성체성사 – 세상을 향한 공동체
신앙인은 가족이기주의에서 벗어나 세상을 향한 공동체적 삶을 살아야 합니다. 가족 공동체는 하늘나라 공동체를 향하는 과정이며 도구입니다. 지상에서의 가족 공동체는 분명 중요하고 모든 공동체의 기초가 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좁은 의미의 혈연적 가족 공동체만 속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하느님의 공동체, 교회 공동체의 구성원입니다. 성체성사는 확장된 가족 공동체에 대한 분명한 징표입니다.
“성찬례는 우리가 교회라는 유일한 몸의 지체가 되라고 요구합니다.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받아 모시는 이들은”(186항) 이미 한마음 한 몸의 공동체가 되며 서로 서로에게 형제자매가 됩니다. “우리는 이 성사의 신비가 사회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가난한 이들과 고통받는 이들에게 무관심하거나 다양한 형태의 분열과 증오와 불평등에 동의하는 이들은 모령성체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올바른 마음가짐으로 성체를 정기적으로 모시는 가정은 형제애, 사회적 양심,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위한 헌신에 대한 열망을 강화합니다.”(186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