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들의 수호성인, 미라의 성 니콜라오(축일 12월 6일)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로 잘 알려진 성 니콜라오는 3세기에 튀르키예 남서부 지중해 연안의 한 항구도시에서 태어났다. 부유했던 부모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성인은 유산으로 물려받은 막대한 재산을 바탕으로 가난한 이들을 구제하고 또한 죄인들을 회개시키는 일에 헌신했다.
가난한 이들을 더 잘 돕기 위해 사제가 되기로 마음먹은 성인은 사제품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선종한 미라의 주교의 뒤를 이어 주교가 되었다. 그런데 이내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그리스도교 박해가 시작되면서 체포되어 10년 넘게 옥고를 치렀다. 그러다가 마침내 신앙의 자유가 선포되며 옥살이에서 풀려난 성인은 교회 재건과 이교도들의 개종을 위해 노력했고, 당시 성행하던 아리우스주의 이단에 맞서 싸웠다, 그런 한편으로 교구 내의 가난한 이들을 구제하고 억울한 일에 시달리는 이들을 도왔다.
성인의 선행과 기적과 관련해서 많은 이야기가 전해 오는데, 이런 이야기들이 있다. 딸 셋을 둔 가난한 아버지가 결혼 지참금이 없어 딸들을 출가시킬 수 없었는데, 성인이 몰래 금이 든 자루를 보내어 세 자매 모두 결혼할 수 있게 되었다. 또 기근이 들어서 먹을 것이 떨어졌을 때 어느 사악한 푸주한이 아이 셋을 죽여서 소금에 절여 먹거리로 팔려고 했는데, 성인이 이 세 아이를 빼내어 되살려냈다.
이런 이야기들과 함께 성탄 시기가 되면 성인이 어린이들과 젊은이들에게 선물과 축복을 전해 준다는 이야기도 전해 오게 되었다. 그리하여 오늘날에도 성인은 어린이들과 가난한 이들의 수호성인으로 널리 공경을 받는다.
버림받거나 학대받는 아이들의 수호성인, 성녀 제르마나 쿠쟁(축일 6월 15일)
성녀 제르마나 쿠쟁은 16세기 프랑스의 툴루즈 부근 어느 마을에서 가난한 농부의 딸로 태어났다. 태어나면서부터 병약했던 성녀는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새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게다가 연주창이라는 부스럼 병까지 생겨 고생했는데, 새어머니는 행여라도 자기의 친자녀들에게 병이 옮을까 싶어 어린 성녀를 심하게 구박했고, 심지어는 집에서 내쫓아 양 우리에서 양들과 함께 지내게 했다. 성녀는 찌꺼기 음식을 먹고 벽장이나 양 우리에서 잠을 자며 지냈고, 아홉 살이 되면서부터는 양을 치며 살았다. 전해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성녀는 양치기 지팡이를 땅에 꽂아 놓고 성당에 가서 미사에 참례하곤 했는데, 그러면 양들이 그 지팡이 주위로 모여들었고 그래서 늑대들에게 물려가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이렇듯 신심이 깊고 참을성까지 대단한 성녀는 모든 것을 좋게 받아들였고, 늘 누구에게나 도움을 베풀고자 했다. 사람들은 이런 성녀를 보며 감탄했고, 차츰 성녀를 사랑하게 되었다. 한번은 성녀가 자신이 먹을 빵을 거지에게 나누어주다가 새어머니에게 들켰다. 새어머니는 성녀가 빵을 훔쳐다가 거지에게 주었으려니 생각하고 성녀를 호되게 꾸중하며 때리려 했다. 성녀가 절대 훔치지 않았다고 결백을 주장하면서 앞치마를 펼쳐 보였다. 앞치마에는 빵이 아니라 아름다운 봄꽃들이 가득했다. 이 일이 있고 나서 새어머니도 마음이 누그러져서 조금씩 성녀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러나 성녀는 22살 때 계단 아래 구석진 곳에 놓인 매트리스에서 숨진 채로 발견되었다.
입양아들의 수호성인, 성녀 클로틸다(축일 6월 3일)
성녀 클로틸다는 5세기 프랑스의 리옹에서 왕의 딸로 태어났다. 성녀는 비신자인 아버지의 양해를 얻어 가톨릭 신자인 어머니에게서 가톨릭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그러나 숙부의 손에 아버지는 암살당했고, 어머니는 우물에 던져졌으며, 성녀와 자매 크로나는 왕궁에서 쫓겨났다. 그리하여 크로나는 수도원에 들어가 수도 생활을 했다. 그리고 성녀는 우여곡절 끝에 프랑크 왕국의 초대 왕인 클로비스의 청혼을 받았다.
성녀는 남편을 그리스도교로 인도하기 위해 애썼다. 그런데 첫아들이 세례를 받은 지 얼마 안 되어 죽자, 남편은 아들이 어린 나이에 죽은 것이 세례를 받은 탓이라고 생각하며 아내를 원망했다. 그렇지만 결혼 전에 약속한 바가 있어서 다른 자녀들이 세례받는 것을 막지는 않았다. 마침 둘째 아들 또한 세례를 받은 뒤 중병에 걸렸는데, 이번에는 다행히도 성녀의 간절한 기도로 건강을 되찾았다. 그 뒤 태어난 두 아들과 딸 하나는 모두 건강하게 자랐다.
5세기 말에 게르만족의 일파인 알레마니족이 프랑크 왕국을 공격해 왔고, 클로비스 왕이 이끄는 군대는 전쟁에서 패하며 수세에 몰렸다. 군인들의 사기가 떨어지고 탈주병이 속출하는 가운데, 클로비스 왕은 국가의 운명이 걸린 전투에서 만약 자신이 승리한다면 아내가 믿는 그리스도를 전 국민과 함께 섬기겠다고 기도하며 다짐했다. 그리고 아내인 클로틸다의 기도로 힘을 얻은 클로비스 왕의 군대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 승리를 계기로 프랑크 왕국의 많은 이들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했다.
그 뒤 클로비스 왕이 세상을 떠나자, 성녀는 궁궐을 떠나 수도원으로 가서 앓는 이들과 가난한 이들을 돌보며 지냈다. 그러던 중 아들들 사이에 권력 다툼이 벌어졌고, 성녀는 그 와중에서 죽은 아들의 자녀들, 곧 손자들을 받아들여 키웠다. 그러나 그렇게 보호하며 키우던 손자들이 숙부의 손에 살해당하는 사태가 벌어졌고, 이를 지켜보는 성녀의 기도는 더욱 간절해졌다. 그리고 성녀는 숨을 거두기 전에 아들들이 화해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고아들의 수호성인, 프란치스카 사베리아 카브리니(축일 11월 13일)
성녀 프란치스카 사베리아 카브리니는 1850년 이탈리아 북부의 한 농가에서 13명의 형제자매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성녀는 18세 때 부모를 여읜 뒤 집을 떠나 고아원에 가서 고아들과 함께 지냈다. 이때 교사가 되려던 꿈을 접고 수도자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처음에는 건강상의 문제로 두 수도회로부터 입회를 거부당했고, 끝내는 소녀들을 교육하는 데 헌신하는 ‘성심의 선교 수녀회’를 세우게 되었다. 이 수도회는 1880년에 교회의 승인을 받은 뒤 이탈리아의 여러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9년 뒤에는 미국 뉴욕 대교구장의 초청으로 뉴욕에서 이탈리아 이민자들을 돌보는 일을 시작했다. 그리고 미국에서 성심의 선교 수녀회는 성녀의 고아들에 대한 애틋한 마음과 고아들과 같이 지낸 경험을 바탕으로 고아원, 병원, 학교와 관련되는 일들을 하게 되었고, 이 활동은 남북 아메리카와 영국으로까지 확장되어 나갔다.
1917년에 선종한 성녀는 미국 시민으로는 처음으로 성인이 되었고(1946년), 이주민들의 수호성인으로도 선포되었다(195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