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의 샘2
만남의 달 2월
박용욱 미카엘 신부 대구대교구 사목연구소장

1. 노인의 지혜 
센류는 17개 음의 짧은 문장으로 시심(詩心)을 표현하는 일본의 정형시입니다. 해마다 다양한 단체가 주최하는 센류 대회가 열리는데, 노인 요양원 협회가 뽑은 수상작들에는 촌철살인의 지혜와 재치가 돋보입니다. 예컨대 “가슴이 두근거려 사랑일까 했더니 부정맥”이라는 한 할머니의 시나, “연상(年上)이 내 타입인데 이제 없다”는 80대 할아버지의 한 줄 시는 젊은이들도 웃게 하는 노인들의 여유와 유머 감각을 보여주지요.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 어르신들과 젊은이들이 함께 웃을 기회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많은 이들이 노화를 자연스러운 삶의 과정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막아내거나 피해야 할 인생의 장애물로 여깁니다. 보건산업진흥원에서 작성한 ‘2020년 기준 항노화 제조산업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항노화 제품 매출액은 약 19조 6500억원에 달한다고 합니다. 노화를 막거나 늦추고 싶은 마음에 기대어 실로 엄청난 규모의 시장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가파르게 증가하는 노령 인구와 세계 최저의 출산율은 ‘연령차별(Ageism)’이라는 불협화음을 빚어냅니다. 연령차별은 나이 든 사람에 대한 편견, 나이로 인한 차별, 노화나 늙음을 혐오하는 현상을 말합니다. 젊음을 우러르고 노화를 혐오하면서 나이 든 사람들에게 편견과 차별의 굴레를 씌우는 것 말씀입니다. 이런 가운데 노인의 지혜가 빛을 발할 여지는 사라지고, 젊은이와 나이 든 사람들이 각각의 세계에 갇히고 있습니다.

2. 시메온의 눈이 열리다 
그런 가운데 2월의 둘째 날 주님 봉헌 축일 복음(루카 2,22-40)은 예수 아기와 노인 시메온의 만남을 전합니다. 주님 봉헌 축일은 예전에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5세기에는 ‘촛불 미사’(성촉절; Candle Mass)라고 불렀는데, 예수께서 “이방인들에게 주의 길을 밝히는 빛”(루카 2,32)임을 생각하면서 초 축성과 촛불 행렬을 했기 때문입니다. 또 하느님께서 예수 아기를 통해 시메온과 안나 예언자를 만나심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거룩한 만남의 축일’(Feast of the Holy Encounter)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이 만남, 그러니까 노인과 아기의 만남, 구약과 신약의 만남, 하느님과 인간의 만남에는 범상치 않은 면이 있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율법에 따라 정결 예식을 치르기 위해 예수 아기를 안고 예루살렘 성전을 찾습니다. 레위기 12장은 출산 후에 지켜야 할 사항들을 규정하고 있는데, 아들을 낳은 경우에는 여드레째 할례를 베풀고, 이후로 산모는 삼십삼 일 동안 집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삼칠일 동안 금줄을 쳐서 출입을 막고 산모와 아기의 건강을 돌보던 우리 풍속을 연상케 하는 대목이지요. 
이 기간을 다 채우고 나면 번제물로 바칠 일 년 된 어린 양 한 마리를 준비해서 성전의 사제에게 준 다음, 속죄 예식을 거행하도록 명합니다. 양 한 마리를 바칠 힘이 없으면,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두 마리를 가져다가 바치면 됩니다. 복음서가 제물로 비둘기만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요셉과 마리아의 행색은 양을 바칠 수 없는 시골 출신의 가난한 부부가 다들 그렇듯이 초라했겠지요. 
그런데 이 초라한 부부가 안고 온 아기를 보고 일생을 의롭고 경건하게 살아온 예언자 시메온이 감격에 겨워 외칩니다. “주님, 이제는 말씀대로, 이 종은 평안히 눈감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구원을 제 눈으로 보았습니다.”(루가 2,29-30) 지금 눈을 감아도 여한이 없다는 감사의 탄성입니다. 루카 복음서는 시메온의 신상에 대해서 자세히 적고 있지 않지만, 전승에 의하면 힐렐이라는 유명한 학자이며 지도자의 아들로 태어났고, 수도 예루살렘에서도 꽤나 신망을 얻은 인물이었던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유복한 집안 출신의 저명인사였던 사람인데, 노년에 접어들었으니 시력은 아무래도 예전만 못하겠지요. 그러나 어두워진 육신의 눈과 달리 마음의 눈은 더욱 밝아졌나 봅니다. 시골에서 상경한 가난한 부부와 아기에게서 모든 민족들을 위한 구원을 보는 신앙의 눈이 열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뭇사람들이 아들을 갓 출산한 어머니에게 하는 덕담과는 정반대의 예언을 건네면서도 기쁨에 차서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이 아기는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받는 표적이 되어 당신의 마음은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플 것입니다.”(루카 2,34-35) 요즘 어머니들한테 했다가는 질펀한 욕이라도 한바탕 들을 만한 예언입니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성공과 행복의 잣대를 대보자면 아기와 어머니는 결코 축복받은 사람 축에 못 듭니다. 
그러나 시메온은 출세와 영화를 누리라는 덕담 대신 구원의 새 세상이 열렸음을 아이의 부모에게 알려주고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의롭고 경건하게 살아온 끝에 인생의 노년에 깨닫게 된 인간의 진실은 그러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제치고 얼마나 높이 올라서느냐, 혹은 얼마나 많은 것을 성취하고 얼마나 많은 것을 가졌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노인 시메온은 세상이 자랑하는 것들보다 더 중요한 것, 곧 만민에게 베푸신 하느님의 구원을 보았던 것이지요. 예수 아기와 노인 시메온이 만나는 자리, 하느님과 인간이 만나는 자리는 곧 구원을 보는 자리였습니다. 시메온은 하느님께 세상의 영화를 주시도록 기도하지 않았고 이스라엘의 구원을 청했습니다, 그리고 예수 아기는 그에게 구원을 보는 기쁨을 선사하셨습니다.

3. 젊은이와 노인이 만나는 달, 2월 
주님 봉헌 축일이 거룩한 만남의 기회라면, 2월에 맞는 설날은 이 거룩한 만남을 가족들 사이에서 확인해 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입니다. 명절에 만날 가족이 없는 분들도 늘어가지만, 그래도 아직은 윗세대와 아랫세대가 한자리에 모일 수 있는 몇 안 되는 날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토록 소중한 만남의 기회가 서로에게 힘들고 어려운 자리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가족을 보는 눈을 달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시메온이 아기와 그 가족들의 초라한 행색을 개의치 않고 그들을 통해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구원 역사에 기뻐할 수 있었듯, 우리도 우리 가족들과 친지들을 만나면서 세상의 잣대를 들이대지 말아야겠습니다. 그보다 그들에게 베푸시는 하느님의 은총을 알아보는 눈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그들 영혼의 깊은 곳에서 무엇을 갈망하고 무엇에 힘들어하는지 볼 수 있는 눈, 어떤 상황에서도 하느님께서 함께하신다는 믿음, 그리고 하느님께서 그들을 통해 당신의 구원 역사를 계속하시리라는 희망을 읽을 수 있어야겠지요. 
일찍이 화가로 명성을 떨쳤던 수도자 프라 안젤리코는 스스로 쓴 묘비명을 “이 세상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일이라 해서 하늘에서도 중요한 일은 아닙니다.”라는 말로 끝맺었습니다. 봉헌 축일과 설날을 지내는 우리 레지오 단원들이 ‘하늘에서 중요한 일’을 마음에 품고, 여러 만남의 기회를 구원을 알아보는 기쁨의 자리로 만들어 가시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