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천주교회의 첫 사제 성 김대건 안드레아(1845 수품, 조선대목구)와 두 번째 사제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1849 수품, 조선대목구) 이후, 세 번째 사제인 강도영 마르코(1896 수품, 서울대교구) 포함 105명의 사제가 양성된, 한국 천주교회 사제 양성의 못자리 서울 용산예수성심신학교와 예수성심성당은 당시의 자취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순례자들에게 큰 위로와 평화를 주는 순례지이다.
박해시대의 신학교육
우리나라 신학교육의 시작은 성 정하상 바오로에게서 찾을 수 있다. 하상 바오로는 어머니 성 유소사 체칠리아에게서 구전 기도문으로 가르침을 받고 유배 중인 스승을 찾아가 배운 평신도 신학자로서, 1801년 주문모 신부의 순교 이후 조선천주교의 실질적 지도자 역할을 수행한다. 1825년 조선대목구 설치를 교황청에 청원하여 파리외방전교회가 우리나라의 선교를 위해 입국, 조선교구를 이루는데 기여했다. 하지만 천주교가 탄압받던 당시로서는 전문적인 신학교육이 어려웠고, 이후 1836년 신학생 김대건 안드레아, 최양업 토마스, 최방제 프란치스코가 마카오로 유학하면서 두 한국인 사제가 탄생한다.
교황청으로부터 신학교 설립 승인을 얻어 세워진 우리나라 최초의 신학교는 1855년 충청도 배론의 ‘성 요셉 신학당’이다. 좁은 장소와 대박해로 신학생 10여 명의 작은 규모였으나 평신도 교육과 민중 교화는 물론 당시 유일한 초·중·고등교육을 실시한 근대학교 구실을 해냈다. 그러나 1866년(고종3년) 병인박해 때 교장과 많은 교직자들이 순교하자 신학생들도 흩어져 배론 신학교는 창설 11년 만에 폐교된다. 이후 신앙의 자유가 확보됨에 따라 1882년 21명의 유학생이 페낭 신학교로 파견되었다. 20년 후인 1885년 경기도 여주군 강천면 범골(부엉골)에 예수성심신학교가 열려 신학교육을 계승하였고, 신앙의 자유가 신장되던 1887년 서울 용산으로 옮겨졌으며, 오늘날의 혜화동 가톨릭대학교 신학교로 신학교육의 역사가 이어진다.
한국 천주교 사제 양성의 못자리
성직자 양성을 가장 중시했던 파리외방전교회는 병인박해 때 성직자들이 참수된 새남터와 가깝고, 기해박해에 많은 천주교인들이 피 흘린 당고개가 보이고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함벽정 부지를 한불수호조약이 체결되던 1887년 매입하여 용산예수성심신학교와 예수성심성당을 세워 사제 양성의 못자리로 삼았다.
한국 천주교 최초의 신학교 건물인 용산신학교는 1892년 예수성심대축일에 축성되었고, 성당은 그 10년 후인 1902년에 신학교 부속 성당으로 건립, 축성된다. 두 건축 모두 명동대성당과 약현성당을 설계한 코스트 신부(파리외방전교회)가 설계·감독하였다. 성당은 언덕 경사 지형을 그대로 살려 언덕 아래에 있는 전면은 3층, 언덕 위인 후면은 2층의 외형을 이루며 작지만 당당한 외관을 보여준다.
순교자들의 유해를 모셨던 최초의 근대식 신학교 성당
당시의 조선대목구장 뮈텔 주교는 신학교 부속 성당 건립을 위해 후원자를 구하던 중 프랑스인 드 사라 여사로부터 한국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 신부의 순교지에 성당을 건립해야 한다는 조건으로 기부를 약속받는다. 이에 뮈텔 주교는 김 신부의 순교지인 새남터는 홍수로 자주 침수되어 위험하고, 오히려 조선대목구의 유일한 신학교에서 순교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는 점, 김 신부의 뒤를 잇는 조선 신학생들이 공부하는 곳에 성당을 건립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점을 오랜 기간 설득하여 동의를 얻어낸다.
그리고 뮈텔 주교는 후원자의 뜻을 기리기 위해 김대건 신부의 유해를 미리내에서 이장하여 모시기로 결정하고, 1901년 5월 21일에 시복 재판 판사인 프와넬 신부와 기록 서기인 드망즈 신부, 안성본당 공베르 신부와 미리내본당 강도영 신부, 그리고 신자 30여 명이 참관한 가운데 김대건 신부의 유해를 발굴하였다. 발굴된 유해는 5월 23일 용산예수성심신학교로 옮겨 안치하였으며, 성당이 완공된 이후인 1902년 6월 23일 성당 내 제의방에서 제대로 들어서는 오른편 모퉁이 바닥을 파고 그 안에 유해를 안치하였다.
이때 순교자임을 상징하는 ‘빨마가지와 1821~1846 A.K’라고 새긴 대리석 판을 덮어 봉인하였다. 그리고 성당 출입문 상부에는 나무로 만든 명판을 부착하여, 성당 착공일인 1869년 6월 9일과 성당 봉헌일인 1902년 4월 14일, 그리고 김대건 신부의 세례명 안드레아(Andrea)의 이니셜인 ‘A’, 성 김(Kim)의 이니셜인 ‘K’와 생몰연대(1821~1846)를 로마자로 새겨 넣었다.
성 김대건 신부를 비롯, 조선교구 초대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 2대 교구장 성 앵베르 주교, 3대 페레올 주교, 4대 성 베르뇌 주교, 5대 성 다블뤼 주교, 6대 리델 주교, 7대 블랑 주교, 8대 교구장이자 이 성당 봉헌식을 집전한 뮈텔 주교에 이르기까지 8명의 역대 조선 교구장 주교들의 유해가 모두 이 성당에 안치되었었다. 또한 기해박해 순교자인 성 모방, 성 샤스탕 신부를 비롯해, 배론 신학당을 세우고 병인박해 때 순교한 오메트르 신부, 성 위앵, 성 브르트니에르, 성 도리, 성 볼리외 신부 등의 유해도 이 성당을 거쳤다. 이곳에 안치되었던 순교자들의 유해는 그 후 혜화동 신학교 성당을 비롯해 명동 주교좌성당, 절두산 순교성지 등지로 옮겨 모셨고, 역대 교구장들의 유해는 용산 성직자 묘지에 안장했다.
김대건 신부를 위시해 이곳에 안장되었던 순교 성직자 10위가 모두 1984년 한국 천주교회 설립 200주년 때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으니, 용산예수성심신학교와 성당은 한국교회사의 매우 중요한 장소이며 참으로 축복받은 성지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출처: 주평국, ‘하늘에서 땅끝까지-전국성지안내’, 가톨릭출판사,1996>
개방시간
토·일 오전 9시~오후 5시, 추석과 설 연휴에는 개방되지 않으며, 학교와 수녀회 일정으로 방문이 제한될 수 있으니 미리 전화로 확인 후 방문하여야 한다.
서울시 용산구 원효로 19길 49 (원효로4가) 성심여중고 교내
<사진설명(위로부터)>
- 1892년에 세워진 용산예수성심신학교는 반지하 1층, 지상 2층의 벽돌 건물로, 한국 최초의 신학교 건물이다.
- 예수성심성당과 예수성심상(좌) 예수성심성당 출입구 쪽 측면에 설치된 작은 종탑(중) 예수성심성당 후면, 고딕양식으로 작은 명동성당을 연상시킨다.(우)
- 예수성심성당 내부(좌) 성당 출입문 상단 명판. 왼쪽 A는 안드레아(Andrea), MDC CCXXI는 1821년, 오른쪽 K는 김대건(Kim), MDC CCILVI는 1846년, 생몰연도를 뜻한다.(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