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엽 신부의 ‘나눔’
하늘이 맺어준 인연들(1)
허영엽 마티아 신부 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정진석 추기경 선교후원회 이사장

글을 쓰다 보면 외국의 신자들과 편지나 이메일을 통해 인연을 맺는 때가 많은데, 하느님이 주신 인연이라 생각한다. 
2001년 미국에서 온 편지 한 통을 받았다. 당시 나는 가톨릭평화신문에 매주 ‘성경속 인물’을 연재하고 있었는데, 미국에 사는 교포 한 분이 야고보 사도에 대한 궁금증을 편지에 적어 보낸 것이었다. 나는 성경에 나오는 여러 명의 야고보에 대해 아는 대로 답변을 드렸고 이메일 주소도 함께 적어 보내드렸다. 그는 기대 못 했던 친절한 답장이라며 감사의 메일을 보내주셨다. 그렇게 시작된 인연이 지금까지 20년 가까이 지속되고 있다. 
편지의 주인공은 미국항공우주국(NASA) 중앙의료원장인 이병갑 도리노 박사였다. 은퇴 후 고령에도 미국 정부의 요청으로 다시 현업으로 복귀하셔서 일하셨는데, 그분의 위상과 실력을 추측해볼 수 있다. 선교사이며 열심한 신앙의 소유자인 도리노 원장님을 알면 알수록 그분의 삶을 알리고 싶은 욕구가 생긴다. 그분의 삶 자체가 고단하고 슬픈 우리 현대사를 말해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모든 역경을 딛고 미국의 최고 권위자로 성공한 힘은 그분이 가진 깊은 신앙 때문이라 확신한다. 
소신학생으로 덕원신학교, 서울신학교에 다니다 가톨릭대 의대로 전과한 그는 가톨릭대 의대와 미국 존스 홉킨스대에서 학위를 받고, NASA 메디컬센터 원장을 지낸 미국에서도 주목받는 원로 의료인이다. 국내에서 4년간 경희대 의대 교수로 지냈지만 유신독재 정권에 항거하다가 정보기관에 수배되자 어쩔 수 없이 미국으로 이주해, 미 해군에서 군의관으로 복무하며 잠수 의학을 전공하고 NASA 메디컬센터에서 일해왔다. 그는 사제가 되겠다던 약속은 못 지켰지만 평신도로서 미 앨라배마주 헌츠빌에 있는 공소회장으로 활동하며 사제가 되지 못한 것에 대한 보속(?)으로 250여 명을 세례로 이끌었다고 한다. 다시 미국의 부름을 받아 고령에도 NASA 메디컬센터장으로 일하시다 이제는 완전히 은퇴하시고 주변 이웃들을 위해 봉사하고 계신다.
이 도리노 박사님과 나눈 이야기들은 어른들뿐 아니라 젊은이, 어린이에게도 꼭 알리고 싶다. 성모님의 군대로 세계 평화를 위해 묵주기도를 바치는 레지오 단원에게는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말씀드리고 싶다. 
여러분들의 이해를 돕고자 이야기들을 인터뷰 형식으로 재구성했다.

허영엽 마티아 신부 태평양을 건너온 편지 한 통으로 우리가 20년 넘게 인연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제가 쓴 글을 매주 기다리며 읽으셨다니 감사합니다.
이병갑 도리노 박사 허 신부님, 이번에 새로 펴내신 책들을 보내주셔서 고맙습니다. 신앙과 성서를 쉬운 글로 알려주는 것이 하느님께서 신부님께 주신 달란트라고 믿습니다. 신부님의 글을 먼 이국땅에서도 보고 깨닫는 사람들이 많기에, 제가 신부님은 수십 개의 본당을 사목하는 것이라 말씀드렸던 것입니다. 성서를 필사한다는 마음으로 신부님의 글을 전부 타자해서 컴퓨터에 보관하고 있습니다. 성서를 읽으면서는 이해하기 힘들었던 대목들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저도 언젠가 그리스 성지순례를 갔을 때 성지순례 오신 미국 교포 자매님이 자신의 본당 주보에서 제가 쓴 강론 ‘어머니’를 읽고 큰 감동을 받았다고 하셔서 놀란 적이 있어요. 처음 보는 자매님이 저를 와락 끌어안으시며 울음을 터뜨리셨어요. 저도 울컥했지요. 글이란 늘 신비하다고 느껴요. 저는 원장님이 북한군, 국군, 미군의 군복을 바꾸어 입을 수밖에 없었던 이야기에, 우리 할아버지 아버지들이 겪은 현대사의 고통이 느껴졌어요.
저는 소신학생으로 전쟁 전부터 북한이 신부님들을 납치하고 천주교인들을 박해하는 것을 수없이 봤어요. 6.25 동란이 시작되고 몇 달 후 나는 평양 신3리 전차 정거장 앞길에서 강제로 인민군에 붙잡혔어요. 당시 소신학생으로 겨우 열일곱 살인데도 총알받이로 낙동강 전선으로 보내졌던 거죠. 연합군이 인천상륙작전을 성공한 후 북한군이 북쪽으로 후퇴를 시작했어요. 저는 패잔병이 되어 줄지어 행군하다 어떤 골목길을 지날 때 내 마음속에 어떤 목소리를 들은 것 같아요. 그래서 무조건 산 쪽으로 도망쳤어요. 빗발치는 총탄에 무사히 살아남은 게 참 신비롭죠. 
산속에서 너무 배가 고파서 한밤중에 마을에 음식을 훔치려 내려왔어요. 경상북도 아주 작은 시골이었는데 큰집이 보였어요. 안을 보다가 달빛에 반짝이는 십자가를 보고 깜짝 놀랐어요. 달빛에 천주교 공소라는 간판이 또렷이 보였어요. 저는 배고픔도 잊고 죄송하여 십자성호를 긋고 무릎 꿇고 기도드리고 다시 산으로 도망쳤어요. 탈영범은 인민군에게 붙잡히면 즉결처분당했고, 한국군에게 잡혀도 안전이 보장되지 않았어요. 그래도 주님의 은총으로 우여곡절 끝에 저는 많은 분의 도움을 받아 제주도의 신학교에 가게 되었어요.

제주도에서의 신학교 생활은 어땠나요? 
6.25가 일어난 이듬해 서울의 신학교가 제주도로 피난 갔어요. 현재의 서귀포시 근처 서홍리 작은 마을의 공소 건물이었어요. 서홍리는 한라산 공비들의 습격이 잦았던 곳이에요. 서홍리의 입구인 성문을 신학생들과 주민 여자들이 같이 지켰죠. 1951년 1월의 비가 내리는 캄캄한 밤이었는데 공비의 습격을 받게 되었어요. 저는 죽창을 들고 있었는데 총을 쏘며 달려오는 공비들을 대항할 수 없어 높이가 10미터도 더 되는 포플러나무 꼭대기에 올라가서 살았어요. 수십 년이 지났는데도 그곳을 찾으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어요. 저는 천사가 이끌어주셨다는 생각이 들어요. 6.25 전쟁 때와 그 후에도 그런 체험을 정말 많이 했어요.

NASA에서는 주로 어떤 일을 맡으셨었나요?
국가안보라 다는 말하기 어렵지만 우주로 떠나는 우주인에 대한 모인 것에 관여했어요. 머리끝부터 신발까지 어느 하나 빼놓지 않고 우주비행사들과 엔지니어 등의 선발, 훈련 및 건강관리를 했어요.(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