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근처 산책길에 공터가 있었고, 그곳엔 들풀이 무성했다. 공터 가장자리에는 허락받고 일군 것인지 알 수 없는 두세 개의 고랑이 있었다. 고랑은 무성한 풀을 힘겹게 이겨내면서 작물을 간신히 품고 있었다. 작물이 안쓰럽긴 했지만 ‘여기엔 무엇이 들어올까?’ 하는 견물생심이 앞서 “한적한 곳이라 독서실 아니면 장사가 안될 텐데” 한마디 툭 던지고 무심히 지나갔다.
몇 달 뒤 이름 모를 들풀 사이에서 힘겹게 작물을 품고 있던 고랑 옆으로 푯말이 하나 어색하게 서 있었다. 보이지 않던 것이라 눈길이 갔다. 그곳엔 ‘성전 건립 예정지’라는 문구와 함께 조만간 다가올 공사로 땀 흘려 키워낸 작물의 결실을 가져가지 못할 이름 모를 분들에 대한 걱정이 수줍게 적혀 있었다.
각박한 세상 속, 남의 땅에 몰래 경작하고 부당이득을 취하는 이들에게 ‘엄중 경고’, ‘고발’이라는 단어가 어울릴 법한 세상이라 생각했던 나에겐 신선한 문구였고, 동시에 참 어색한 푯말이었다. 푯말을 보며 고개를 갸웃할 때 따스한 온기가 볼을 타고 올라오는 걸 느꼈다. 누군가 따스한 호흡으로 “호~”하고 온기를 불어 주는 것 같았다.
그리고 1년 뒤 성당은 예정했던 시간보다 기다림을 더한 후 세워지기 시작했고, 정식 공사 안내판에 새겨진 예정일보다 3개월이라는 기다림을 더 한 후 완성되었다.
성당 건립 후 자연스레 교리 수업을 받게 되었지만, 생각보다 긴 수업 기간에 놀랐고 매 주일 9시라는 수업 시간에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미약한 믿음은 ‘과연 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으로 채워져 갔다. 그래도 ‘하다가 안 되면 포기하지 뭐’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교리 수업을 시작했다. 집 근처이고, 산책할 때마다 보던 성당이었기에 진정 가벼운 마음 그지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하느님, 예수님, 성모님, 열두 제자, 거룩한 교회, 성령에 대한 신부님의 설명이 더해질수록 가볍기 그지없던 나의 맘은 부담으로 변해갔다. 결국 ‘난 아직 주님을 모시기 합당치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때 대부님을 만나고 레지오 마리애 단원분들을 만났다. ‘안 되겠어. 그만해야지’ 하고 결론을 내렸을 때 단원분들이 먼저 악수를 청해주시고, 미사 방법을 알려주시고, 작은 성물을 선물해 주셨다. 그분들의 진심이 느껴졌다. 무엇보다 “성당을 다녀야 할지? 내가 성당에 맞는 사람인지? 모르겠어요”라고 할 때 대부님의 “주님이 이끌어 주실 거니 걱정하지 마”라는 말씀은 큰 힘이 되었다. 그렇게 교리 수업을 무사히 마치고 대부님을 따라 레지오 마리애 입단하게 되었고 선서를 하고 정식 단원이 되었다.
진정 주님이 이끌어 주실 거라는 믿음뿐이었는데, 강이 바다의 끝자락에 작은 모래톱을 만들 듯이 나 역시 주님의 크신 품 끝자락에 작게나마 내 자릴 마련하게 된 것이다.
오늘도 레지오 마리에 회합에 간다. 바쁜 회사 일로 저녁을 못 먹고 오는 막내 단원을 위해 성모 마리아상 옆 탁자에는 단원들이 준비해 주신 샐러드와 고구마가 조용히 놓여 있다. 저녁 미사 참석으로 아무도 없는 하늘의 문 Pr. 회합실 문을 열고 들어간다. 오늘도 난 그분들이 남겨 놓은 진한 온정의 향기에 스며들며 촛불을 켜고 기도를 준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