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하~, ‘전례공간’
거룩한 공간이란?
윤종식 티모테오 신부 가톨릭대학교 교수

프랑스어를 배우러 파리에 갔다가 고딕 성당으로 유명한 샤르트르 대성당에 간 적이 있습니다. 다행히 관광객이 적은 시간이어서 ‘기도하고 묵상하기 참 좋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웅장한 오르간 연주가 들려왔습니다. 고개를 들어 소리가 울려 퍼지는 오르간의 파이프들을 바라보다가 성당 벽면에 펼쳐진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한 빛의 향연에 넋을 잃고 묵상을 하느님께 대한 찬미로 바꾸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유럽의 많은 성당이 웅장하고 멋있으며 역사적인 건물이지만 그 안에서 거행되는 미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수가 적음에 실망하던 저에게 성당 자체가 주는 성스러움을 통해 하느님의 현존을 느꼈던 것이지요.  
교회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모인 공동체’라는 의미의 ‘교회’(ecclesia)가 있으며, 이 공동체적 교회가 모여서 전례를 거행하는 장소인 ‘성당(聖堂)’이 있습니다. 가톨릭에서 가장 저명한 성령론 학자인 이브 콩가르(Yves Congar) 추기경은 성당을 “신비인 교회의 공간적 이콘”이라고 합니다. 그 성당 안에서 거행되는 전례는 당신 백성 가운데 계시는 하느님의 상징적 현존을 표현하며, 하느님이 인간 역사에서 이룩한 놀라운 신비들을 기념합니다. 
여기서는 왜 사람은 종교적인 성스러움에 대해 갈망하는지? 그래서 어떤 공간을 형성하는지에 대해서 알아보려 합니다.    

공간과 시간에 연결된 사람
사람은 기본적으로 두 좌표, 곧 시간과 공간이라는 조건에서 살아갑니다. 사람은 시간 안에서 생활하며 공간을 점유합니다. 이것이 삶의 제한처럼 느껴져서 시간의 구애를 받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을 추구하며, 국경 없이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새를 동경할 때가 있습니다. 아무래도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체험하면서 고통을 겪는 과정을 통해 이런 한계들을 뛰어넘는 세상을 희망하는 것이 사람의 본성이 아닐까 합니다. 
그런데, 이런 한계를 없애는 영원한 실재를 만난다면 자기 자신도 그렇게 시간과 공간이라는 감옥에서 탈출하여 영원과 무한함을 누리리라는 열망을 지니게 됩니다. 사람 스스로는 이룰 수 없는 이 희망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절대적인 하느님을 만나면서 현실이 될 수 있음을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발견합니다. 그래서 그분을 믿고 따르며, 전례 거행을 통하여 그분의 말씀과 행적을 기념하며 우리의 희망이 실재가 되기를 간절히 청하지요. 
건축학자인 김광현 서울대 명예교수는 ‘성당, 빛의 성작 - 전례와 공간’에서 공간과 시간에 대한 지평을 라틴어를 통해 넓혀줍니다. “라틴어 ‘templum(성전)’에서 ‘tem-’은 잘라낸 땅이라는 뜻이다. 이곳의 거룩함과 저곳의 속된 것을 구별하기 위해 땅을 잘라냈다는 말이다. ‘tem-’은 ‘뻗치다’, ‘잡아당기다’라는 뜻도 있다. 제단 앞에서 공간을 신중하게 비웠다는 말이다. 또 종교학자들은 ‘templum’은 ‘tempus(시간)’와 어원이 같다는 것에 주목한다. 시간과 공간의 지평에서 일어나는 움직임의 공간적인 측면이 ‘templum’이고, 질적으로 다른 그것의 시간이 ‘tempus’다.” 곧 ‘하느님의 집’이면서 ‘하느님 백성의 집’인 성당은 공간적으로 성별(聖別)된 ‘templum’이자, 시간적으로 성별된 ‘tempus’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종교적 특성이 만든 공간
종교학자 미르체아 엘리아데(Mircea Eliade)는 ‘종교의 의미-물음과 답변’에서 사람은 ‘종교적 인간’(homo religious), 곧 모든 사람에게는 종교적 성향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의 종교적 성향은 매주 교회나 사찰에 찾아가는 적극적인 종교 참여자만을 의미하지 않으며, 그에게 종교는 “반드시 신, 신들, 정령에 대한 신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성스러움의 경험을 가리키며 따라서 존재, 의미, 진리의 개념과 연관이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스스로 한계가 있음을 깨달으면서 그 한계를 초월한 존재에 대한 경외와 두려움, 그리고 신비로움을 지니는 종교성이 나타납니다. 종교현상학자인 루돌프 오토(Rudolf Otto)는 1917년에 출간된 ‘성스러운 의미’에서, 성스러운 것 앞에서의 두려운 감정,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는 신비(mysterium tremendum), 압도적인 힘의 위력을 분출하는 장엄함(majestas), 곧 존재의 완전한 충만성이 꽃 피어나는 매혹적인 신비(mysterium fascinans) 앞에서의 경건한 두려움에 대해서 말합니다. 
이러한 성스러운 것에 대한 경건한 두려움은 건축에 반영됩니다. 김광현 교수는 사람이 건축을 시작한 것은 비바람과 맹수를 피하기 위한 피난처(shelter)를 만드는 것이었는데, 이런 피난처가 사람이 쉬거나 잠을 자는 곳만이 아니라, 사람의 두려움을 신비로움으로 바꾸는 힘도 함께 지니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원시 건축에는 두 가지 집 말고는 없었다. 하나는 신을 위해 짓는 집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을 위해 짓는 집이다. 신의 집을 만드는 방식은 두 가지였다. 첫째, 임신한 여자의 모습을 그리거나 동굴 내부공간에 ‘어머니로서의 대지’라는 관념을 투사함으로써 자연의 풍요로움을 기원했다.”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최초의 거룩한 공간
창세기 2장과 3장은 우리에게 본성적으로 알고 싶어 하는 욕망과 절대적 지배, 그리고 거룩함에 대한 통찰력을 갈망하는 사람을 드러냅니다. 이 갈망에 대해 잘 아는 유혹자 뱀은 이렇게 속임수를 씁니다. “너희는 결코 죽지 않는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 너희 눈이 열려 하느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하느님께서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창세 3,4) 이 부분에 대해서 전례학자인 빈첸죠 가티(Vincenzo Gatti)는 ‘전례와 예술’에서 “창세기 3장과 성경에서 일반적으로 ‘안다’는 용어는 창조된 실재와 자신의 삶에 대한 본질적인 지배와 동등하다.”라고 말하며 ‘어떤 것을 안다’고 했을 때, ‘그것을 지배한다’는 의미임을 깨닫게 합니다.
사람의 이런 지적 호기심과 절대적 지배 욕구는 결국에 ‘죽음’과 ‘알몸에 대한 인식’이라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죽음이 아담과 하와에게 처음부터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었음을 사도 바오로는 말해줍니다. “한 사람을 통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죄를 통하여 죽음이 들어왔듯이, 또한 이렇게 모두 죄를 지었으므로 모든 사람에게 죽음이 미치게 되었습니다.”(로마 5,12) 
“동쪽에 있는 에덴에 동산 하나”(창세 2,8)는 사람이 하느님의 얼굴을 마주 보며 대화를 나누었고 의식주에 관한 염려와 죽음에 대한 걱정이 없었던 ‘거룩한 공간’이었습니다. 여기서 ‘거룩함’의 근거는 바로 ‘하느님의 현존’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느님의 현존을 깨닫고 흠 없이 살아가는 것을 ‘성덕’이라고 합니다. 성덕의 소명에 대해서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2018년)에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느님의 말씀인 “너는 내 앞에서 살아가며 흠 없는 이가 되어라”(창세 17,1)를 상기시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