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풍경과 현실
저출산 고령화 사회에 대한 우려와 인구절벽 시대에 관한 담론을 언론에서 쉽게 목격합니다. 합계 출산율 0.78이라는 숫자도 자주 언급됩니다. 얼마 전에는 2050년에 청년층 비율이 10%대로 줄어든다는 기사가 언론을 도배했습니다. 이 시대의 젊은 세대들은 결혼을 포기하거나 결혼에 대해 점점 무관심해지고 있습니다. 결혼해도 자녀를 갖지 않겠다는 청년들의 비율도 높아지고 있습니다. 젊은 세대들 사이에 비혼, 만혼, 무자녀의 추세가 강화되고 있습니다.
결혼에 관한 관심이 줄어드는 것은 아무래도 개인주의 경향의 강화와 경제적 문제 때문일 것입니다. 자기의 생각, 자기의 감정, 자기의 욕망과 바람이 무엇보다 중요시되는, 주체적이고 이기적인 세태 속에서 상대방과 함께 살아가는 일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 생각과 감정과 욕망을 조율하면서 살아가는 일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젊은 세대들은 함께 살면서 감내해야 하는 희생과 양보와 조율의 과정을 잘 견디지 못합니다. 젊은 세대의 탓이라기보다는 성장 환경과 교육 환경의 문제이지요. 이 시대의 젊은 세대들은 살아오면서 공동체적 경험과 훈련의 기회를 잘 갖지 못했습니다. 누구의 탓이라기보다는 이 시대의 가정과 교육 현장의 풍속도가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특정 세대의 잘못이라기보다는 모두의 책임입니다. 어쩌면 우리 기성세대가 잘못한 것입니다. 우리가 만들어 놓은 세상에서 젊은 세대가 자랐습니다.
자녀 출산에 관한 관심이 줄어드는 것은 아마도 개인주의 경향도 있지만 사회·경제적 요인이 더 심각한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최근의 설문조사를 보면, 청년 세대는 자녀 계획을 갖지 않는 원인으로 자녀 양육과 교육 비용에 대한 경제적 부담과 주거 공간의 확보를 위한 경제적 불안정을 제일 많이 꼽았습니다. 집값 안정, 육아 휴직과 근로시간 단축, 돌봄과 의료 서비스의 확충, 청년 고용의 확대 등 사회경제적 환경과 요인을 개선하지 않고서는 출산율 증가가 힘들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결혼과 출산과 양육의 문제를 단순히 사람들의 생각과 가치관의 차원에서만 접근해서는 안 됩니다. 정치, 사회, 경제, 문화, 종교 등 모든 차원에서 검토되고 고려되어야 합니다. 물론 결혼과 출산과 양육에 대한 올바른 가치관을 정립하는 일은 중요하지만 말입니다.
임신과 출산에 관한 교회의 입장
“가정은 새 생명이 태어나는 곳일 뿐만 아니라 그 생명을 하느님의 선물로 환대하는 자리입니다”(‘사랑의 기쁨’, 166항). “아이들은 부부애의 살아 있는 표상이고 부부 일치의 영원한 징표이며, 아버지와 어머니라는 존재의 생생하고 불가분한 종합입니다”(165항). “대가족은 교회의 기쁨입니다. 그러한 가정은 사랑의 풍성함을 나타냅니다”(167항). 가정과 생명 출산과 자녀에 관한 교회의 입장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선언입니다.
인간 생명은 수태되는 순간부터 하느님 사랑과 보호 속에서 존재합니다. “모든 아이는 언제나 하느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으며, 수태되는 순간에 창조주의 영원한 꿈이 이루어집니다”(168항). 하느님의 사랑과 보호 속에 있는 생명을 인간이 거부할 수는 없습니다. 생명 탄생은 “언제나 먼저 사랑하시는 하느님 사랑의 수위성을 반영하는 것입니다”(166항). “주님께서 부모에게 맡기신 새 아이라는 선물은 수용으로 시작되고 계속해서 평생 보호를 받으며 최종 목적인 영원한 생명의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166항). 인간 생명의 여정에서 부모는 주님의 구원 사업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생명 탄생에 있어서 부모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특히 임신을 수행하는 모성의 역할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임신은 하느님 “창조의 신비”에 참여하는 일입니다(168항). “임신한 여성은 하느님의 계획에 참여하면서 자신의 아이에 대하여 꿈꾸게 됩니다”(169항). “혼인한 그리스도인 부부의 이러한 꿈에는 반드시 세례가 담겨 있습니다. 부모는 기도로 세례 준비를 하면서 아이가 태어나기도 전에 예수님께 아이를 맡겨 드리는 것입니다”(169항).
오늘날 과학의 발전으로 태아 상태에서 신체적 특성과 질병의 유무를 판단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 생명의 심오한 정체성은 오직 하느님만이 아십니다(170항). 새로운 생명이 부모의 계획이나 기대에 적합한지를 따지는 것은 잘못입니다(170항). “하느님께서는 모든 아이의 탄생을 기다리시고 그 아이를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시며 아낌없이 환대하십니다”(170항). 부모의 무조건적 환대와 사랑은 이러한 하느님 사랑을 보여주시는 도구입니다(170항).
모성의 사랑과 양육
부모의 존재는 자녀의 양육과 조화로운 성숙에 필수적입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주님께서 지니신 아버지의 면모와 어머니의 면모를 보여줍니다”(172항). 자녀 양육에는 부성과 모성 모두의 역할이 필요합니다. 물론 남성성과 여성성이라는 성적 정체성에 기초한 부성과 모성이라는 획일적 구분은 오늘날 새로운 이해가 요청되지만 말입니다.
자녀 양육에 있어서 모성의 역할은 핵심입니다. “특히 태어나서 처음 몇 달 동안은 어머니의 존재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173항). 자녀 양육의 책임과 주체를 여성성과 모성에만 일방적으로 부과하는 것은 분명 잘못입니다. 하지만 “여성의 고유한 능력, 특히 모성에는 의무가 주어집니다”(173항). 가정에서의 살림과 자녀 양육은 세상의 어떤 일들보다 소중히 여겨져야 하며 그 실제적 가치 역시 높이 평가되어야 합니다. “여성이 된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의 특별한 사명을 포함하는 것으로, 사회는 모든 이의 선익을 위해서 이 사명을 보호하고 지켜주어야 합니다”(173항).
자녀들의 신앙 양육에도 어머니의 역할은 필수적입니다. 자녀들은 무엇보다 어머니를 통해 “온유함과 헌신과 도덕적 힘”(174항)에 대해 배웁니다. 또한 어머니가 신앙을 살아내는 모습 그 자체가 자녀들에게 가장 결정적인 신앙 전수와 신앙 교육의 통로가 됩니다(174항).
부성의 사랑과 양육
자녀에게 아버지의 존재는 중요합니다. 사실, 오늘날 여성성과 모성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필요한 것만큼, 남성성과 부성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필요합니다. 지난 시절 남성성과 부성은 권위주의와 억압의 상징으로 작동되기도 했습니다. 가정보다는 사회적 성취에 집중하는 것이 남성의 미덕으로 여겨지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변했습니다.
자녀의 성장에 동반할 수 있는 아버지가 필요합니다. 자녀 양육에 있어서 아버지의 부재는 심각한 문제입니다(176항). “아버지라는 존재는 아이가 현실의 한계를 깨닫도록 도와주는 것이며, 나아갈 방향의 제시, 더 넓고 도전이 넘치는 세상으로 나아가기, 노력과 헌신의 권유라는 두드러진 특징을 보입니다”(175항). 아버지의 “현존은 통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177항). 인생이라는 도전과 모험의 장에서 아버지의 존재가 보여주는 건강한 남성성은 자녀에게 깊은 영향을 미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