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느 신부님이 분노에 대해서 감동적인 강론을 했습니다. 미사가 끝나자 한 자매님이 신부님에게 다가와서 말을 붙입니다. 성질이 너무 급한 게 고민이라면서요. 자기가 영 형편없는 사람은 아니라고 항변하고 싶었던지 핑계를 덧붙입니다. “신부님, 저는 작은 일에 가끔 폭발하지만, 뒤끝은 없습니다. 금방 풀어버립니다. 마음에 두고 꿍한 채 있지는 않아요. 일 분도 안 걸려서 그 사람이랑 그 자리에서 툭툭 다 털어버리고 끝납니다.”
신부님이 정중히 대답했습니다. “대포도 그렇습니다. 한 방이면 끝나지요. 오래 안 걸립니다. 하지만 한 방만 쏴도 그 결과는 엄청납니다. 다 박살 나지요.”
2.
‘비대면’에 어느새 익숙해진 요즘입니다. 혼자 있는 외로움보다 함께 할 때 느끼는 어려움이 더 크다고 느끼는 분들이 많아진 것 같습니다. 차라리 적적한 게 낫지,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마음고생하고 여러 가지 신경 쓰기 귀찮다는 분도 많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과 반가운 인사를 나누는 것도 잠시, 말을 섞다 보면 속을 뒤집고 상처를 헤집는 일이 왕왕 생깁니다. 주고받는 말 속에 가시가 돋거나, “나는 뒤끝 없는 사람”이라는 분들이 터뜨리는 말 폭탄 때문에 예전에 패였던 골이 더 깊게 패기도 합니다. 내게는 자랑거리가 남에게는 상처가 될 수 있음을 알고 눈치를 봐야 할 때도 있는데, 사정없이 질러대는 말들 때문에 뭇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신앙생활, 속 편하게 혼자 기도하고 미사만 보면 좋겠다고 마음을 먹게 됩니다. 코로나 사태가 끝났어도 많은 공동체가 예전 같은 활력을 찾지 못하는 데는 이런 이유도 한몫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공동체 생활을 최소한으로 줄이면 말의 폭탄을 맞을 일도, 마음의 상처가 덧날 일도 없겠지요. 말하자면 ‘마음의 평화’ 비슷한 상태를 누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 사이에 부대끼면서 겪는 갈등과 불편함이 싫어서 고립을 선택하는 것은 마치 무균실 안에만 머무르다 면역력이 떨어져서 집 밖으로 못 나가게 된 환자 신세와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는 사람들과 어울리고 대화하고 때로는 마찰을 빚으면서 각자 모난 곳을 둥글게 다듬습니다. 그리고 나와 다른 사람으로부터 새로운 것을 배우며 영성의 길을 갑니다. 무덤 속의 침묵처럼 자기 세계 안에만 갇혀서 ‘조용하다, 평화롭다’를 되뇌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더불어 사는 삶은 계속 연습하고 연마하면서 터득해 가야 하는 것이고, 이 연습은 마지막 날 주님의 잔칫상에 모두가 하나 되어 앉을 때까지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3.
복음서가 전하는 예수님의 행적 전반을 관통하는 핵심도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데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면서 외치신 제일성도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였습니다. 이 하느님 나라의 선포는 하느님 백성을 불러 모으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하느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자마자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집을 건설하는 메시아적 임무를 일깨우면서, 베드로를 그 집의 기초를 이루는 반석으로 부르셨습니다(마태 16,17).
예수님은 이 새로운 공동체가 새로운 성전이 될 것이며(마르 14,58), 옛 성전을 대체할 것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마르 11,12). 공관 복음서에 등장하는 ‘작은 묵시록’(마르코 복음 13장)도 옛 성전을 허물고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마태 5,14)이 하느님의 다스림을 받게 될 것이라는 비전과 관계됩니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가 선택한 이들을 땅 끝에서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을 것이다.”(마르 13,26) 한 마디로 예수님께서 불러 모으신 하느님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의 요체라는 말씀입니다.
4.
이런 예수님의 불러 모으심에 응답하기 위해서 우리 신앙인들이 생각해봐야 할 덕목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새해 첫날 미사,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세계 평화의 날”에 거행하는 신비에서 한 가지 실마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사실 ‘천주의 성모’(Theotokos)라는 성모님의 명칭은 격렬한 신학 논쟁을 거쳐서 교회 전체에 받아들여진 것입니다. 3세기 무렵부터 그리스도인들은 성모님을 ‘테오토코스’라고 부르기 시작했는데, 이 호칭에 거부감을 느낀 이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특히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주교 네스토리우스는 어떻게 인간 마리아가 그리스도의 신성을 낳을 수 있느냐며, 마리아를 그리스도의 어머니라고 부를 수는 있어도 천주의 성모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여기에 대해서 알렉산드리아의 치칠로 총대주교를 중심으로 테오토코스라는 명칭을 고수한 이들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결합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며 맞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느님이요, 참 인간이시다’는 믿음을 비추어볼 때, 예수님을 낳은 마리아를 천주의 성모라고 부르는 게 타당하다는 것이지요. 교회는 431년 에페소 공의회를 통해서 네스토리우스의 주장을 배격하고 ‘천주의 성모’라는 호칭을 받아들입니다.
이 복잡한 신학 논쟁에서 눈여겨볼 것은, 교회가 마리아를 천주의 성모로 공경하는 것이 마리아 자신의 특별함이나 자질 때문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마리아가 빛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참 하느님이요 참 인간이신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인의 품위도 우리 자신의 탁월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라는 사실에서 옵니다. 우리가 다른 이들을 형제자매로 맞아들일 수 있는 것도, 때로 삐걱거리면서도 한 공동체를 이루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을 함께 걸어갈 수 있는 것도 모두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몸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5.
많은 이들이 사람을 만나고 인간관계를 맺을 때 여러 가지 조건들을 생각합니다. 이 사람은 이래서 안 되고, 저 사람은 저래서 안 되고 하는 식으로 말이지요. 나랑 성격이 맞거나 수준이 맞거나 등등의 조건을 붙여서 끼리끼리 모이는 데 그치고 맙니다. 레지오 단원으로서 혹시 그런 식으로 사람을 가리지는 않았는지 돌아볼 일입니다. 나와 다른 이들, 나에게 다소 걸림돌이 될 만한 이라고 해도 ‘하느님 때문에’ 만나고 공동체에 품어 주어야 합니다. 교회가 마리아의 품성이나 자질 때문에 ‘천주의 성모’라는 호칭을 쓰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때문에 그 호칭을 쓰듯 말이지요.
특히 새해 첫날을 세계 평화의 날을 지내는 우리 레지오 단원들 마음 안에 ‘하느님 때문에’, ‘그리스도 때문에’라는 말이 먼저 떠오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생길 수 있는 어떤 갈등과 불협화음도 ‘하느님 때문에’를 생각하는 대범한 마음으로 이겨나가시길 기도드립니다.